오피니언 사설

역사를 바꾼 미국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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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제44대 미 대통령에 당선됐다. 232년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이다. 오바마 후보의 당선은 개인과 소속 정당인 민주당의 승리를 넘어 미 국민의 승리요,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다. 오바마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세계를 위해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과감하게 변화를 택한 미 국민의 용기 있는 선택에 경의를 표한다.

 흑인 노예제의 부끄러운 원죄 위에 건국된 미국은 노예제를 둘러싸고 140여 년 전 참혹한 내전까지 치렀다. 인종적 소수인 흑인에 대한 법과 제도적 차원의 차별은 철폐됐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까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미 국민은 케냐 출신 흑인이 부친이고, 아랍계 성(姓)인 후세인을 중간 이름으로 쓰는 오바마를 대통령에 선출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금기(禁忌)의 벽마저 허물어버렸다. 출신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평가받는 ‘기회의 땅’이 미국이며,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살아있는 꿈임을 입증한 것이다.

미국은 지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무모한 전쟁의 후유증으로 유일 초강대국의 권위는 실추되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오만과 독선으로 민심을 잃었다.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서 미국에 대한 존경심도 훼손됐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미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탐욕이 판치는 자유방임적 금융 자본주의의 버블이 꺼지면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극심한 경기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정치적 대립과 반목 속에 미 사회의 빈부 격차와 계층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미국인의 85%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미국인은 너도나도 투표소로 향했고, 분열이 아닌 통합의 정치로 변화의 희망을 일깨운 오바마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치명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오바마가 당선된 것은 변화에 대한 미 국민의 열망 때문이다. 오바마가 모금한 6억 달러의 선거자금 중 95%가 인터넷을 통한 200달러 미만의 소액기부였다는 사실은 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를 보여주는 동시에 디지털 시대 풀뿌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본다.

민주당은 백악관만 아니라 상·하원까지 장악했다.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이후 오른쪽으로 향하던 항공모함이 30년 만에 왼쪽으로 선회하는 신호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동안 공화당 정부는 시장 만능주의에 근거한 감세와 규제완화, 작은 정부를 절대선으로 신봉해 왔다. 그러면 위에서 아래로 물이 스며들 듯 전체가 고루 혜택을 볼 것이라고 믿었다. 그 성과를 부인할 순 없지만 효과에 비해 부작용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10조 달러가 넘는 국가 채무와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가 그 증거다.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초고소득층과 의료보험조차 없는 4600만 빈곤층이 공존하는 것도 그렇다. 오바마는 당선 소감에서 “미국에 변화가 오고 있다”며 단결을 호소했다. 좌우와 흑백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로 미국이 필요로 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다. 그가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를 누를 수 있었던 것도 경제 이슈 때문이다. 미국에서 난 불이 지구촌 전체로 번지고 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그런 뒤 화재 현장을 정리하고, 그 위에 새로 집을 지어야 한다. 국제사회와의 공조 없이는 불가능하고, 탁월한 리더십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열흘 후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미국에서 열린다. 오바마는 좌우를 망라해 최고의 인재들로 참모진을 짜고,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에 대한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변화에 대한 세계인의 기대가 이처럼 컸던 적도 드물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일방주의 외교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오바마는 겸손하게 손을 내미는 자세로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는 포용력은 미국의 저력이다. 오바마는 통합의 리더십으로 미 국민과 세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