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변화된 대통령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을 기각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했다. 이는 단순한 업무 복귀가 아니라 사실상 盧정부 집권 2기의 막을 연 것이다. 이제 盧대통령과 정치권.국민이 탄핵에 대한 찬반 의견을 접고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헌재의 기각 결정을 놓고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헌재가 대통령의 일부 위법사실을 인정했으니 법적으론 盧대통령이 패배했다거나, 그래도 탄핵이 기각됐으니 정치적으론 盧대통령이 승리했다는 얘기도 말장난에 불과하다.

지난 두달 동안 우리는 과도적 불안에 시달렸고, 국론은 분열됐었다. 그 피해는 가시적으로 혹은 보이지 않게 우리를 멍들게 했다. 따라서 누구든 헌재의 결정을 놓고 승패를 언급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오만한 태도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탄핵 사태 발생의 근본 원인은 대통령과 야당의 갈등이었다. 기세싸움과 오기정치가 극한까지 치달으면서 헌정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로 비화한 것이다. 이 빌미의 제공은 盧대통령에게 있다. 그 점에서 盧대통령의 자기성찰과 겸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대통령이 먼저 국회와 야당을 존중하는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미래를 위해 힘을 모아 갈 수 있다. 또 盧대통령의 집권 첫 1년간은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수를 차지해 '야당이 발목 잡는다'는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선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盧대통령과 여당이 야당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강공 일변도로 간다면 이번 탄핵 과정에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 헛되지 않겠는가.

헌재의 결정문도 盧대통령의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헌재는 盧대통령이 거듭 선거 중립의무를 위반했고, 재신임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등의 발언으로 헌법 준수의무를 저버렸다는 지적을 했다. 헌재가 기각 결정을 한 것은 盧대통령이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의 중대 사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회초리를 들면 될 사안에 몽둥이를 들었기 때문에 기각한 것뿐이다.

헌재가 지적한 사항 가운데 盧대통령이 각별히 유념해야 할 대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대통령의 책무는 헌법의 수호와 자유민주질서의 유지다. 결정문에서 "준법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통령의 언행은 사소한 것이라도 국민의 법의식과 준법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대목이나 "대통령의 권한과 정치적 권위는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므로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는 경고를 각별히 유념해 주기 바란다. 자유민주질서를 수호할 책임을 언급하며 "대통령은 '준법과 법치의 상징적 존재'로서 위헌적.위법적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나서 법치국가를 실현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원칙에만 충실한다면 남은 집권 기간 盧대통령의 치세는 성공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국민에게 불안과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한 것은 적절했다고 본다. 시민단체나 국민도 헌재의 결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헌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만큼 이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탄핵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盧대통령의 오늘 대국민 담화에는 헌재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국민을 힘들게 한 데 대한 솔직한 사과가 담겨 있기를 기대한다. 또 경제와 민생을 최우선시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