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의사 절반이 플라시보 쓴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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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미국 ‘뉴욕 타임스’엔 “미국 의사의 절반이 통상적으로 플라시보(placebo, 가짜약)를 처방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내과·류머티즘 전문의 679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한 달에 최소 두세 번 플라시보를 사용하며, 5%만이 환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영국의 의학전문지 BMJ 최근호에 게재된 연구논문을 근거로 함) 기사의 요지다. 덴마크·이스라엘·영국·스웨덴·뉴질랜드 의사의 절반 가까이가 플라시보를 처방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국내에도 플라시보를 처방하는 의사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플라시보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불필요한 약 복용을 줄여준다는 긍정론과 환자를 속이는 행위로 의료윤리에 반한다는 부정론이다.

◆플라시보 효과=플라시보는 ‘내가 기쁘게 해주겠다’(I will please)라는 뜻의 라틴어다.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약을 의사가 ‘특효약’이라며 환자에게 주면 환자의 증상이 호전되는 현상을 말한다.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선 플라시보를 복용한 환자의 0∼21%가 통증 완화, 8∼27%가 입맛 개선, 7∼17%가 체중 증가, 6∼14%가 활동 배가 등 긍정적인 효과를 얻은 것으로 조사됐다. 플라시보(가짜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한 우울증 환자의 30∼40%가 ‘증세가 나아졌다’고 응답한 조사결과도 있다.

건국대병원 외과 백남선 교수는 “환자가 의사에 대한 신뢰가 깊고, 약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수록 플라시보 효과가 크다”며 “통증을 호소하는 암환자에게 이따금씩 마약성 진통제 대신 플라시보(생리 식염수)를 주사하면 통증 완화와 마약 투여 감소 등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고 말했다.

◆암·정신질환·소화불량 환자에게 효과적=국내에서 의약분업 이후 외래 환자에겐 플라시보가 거의 처방되지 않는다. 의사가 처방전에 플라시보를 명기할 수 없어서다. 주로 입원 환자에게 사용된다. 특히 암·정신과·소화기 질환 병동에서 활용도가 높다.

불안·우울 등 정신질환, 만성 통증, 고혈압 등 만성질환에도 플라시보가 가끔 처방된다. 가슴이 빨리 뛰거나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거나 혈압이 높아 뒷머리가 당긴다고 호소하는 환자에게도 간혹 쓰인다. ADHD 환아에게 사용되기도 한다.

플라시보가 전혀 효과가 없는 질환도 많다. 염증성 질환이 대표적이다. 항생제 대신 플라시보를 복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요즘은 플라시보가 환자의 통증을 덜어주는 것 외에 꾀병 감별·사이비 환자 식별·약효 판정 등 다양하게 활용된다.

한강성심병원 정신과 이병철 교수는 “특히 신약 임상연구를 할 때 플라시보는 없어선 안될 존재”이며 “진짜 신약과 플라시보를 각기 다른 환자에게 먹인 뒤 신약의 효과에서 플라시보의 효과를 뺀 부분만을 실제 약의 효과로 인정한다”고 설명했다.

◆플라시보 전문약도 나왔다=플라시보 효과를 높이려면 플라시보가 진짜약과 꼭 닮아야 한다. 플라시보는 심리적인 치료제인 만큼 약의 색깔·크기 등이 약효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환자는 약이 검거나 붉으면 ‘약효가 강력한 것’으로, 희면 ‘약효가 가장 떨어지는 것’으로 느낀다. 심지어 진짜약의 가격도 플라시보의 약효에 영향을 준다.

지난 5월 7일자 JAMA(미국의학협회지)엔 통증 환자 82명에게 한 알당 2.5달러나 하는 새 진통제와 10센트짜리 약을 둘 다 플라시보로 처방한 연구결과가 소개됐다. 여기서 비싼 약을 먹은 사람은 85%가 통증이 완화됐다고 답변한데 반해 싼 약을 복용한 사람은 61%만이 만족을 나타냈다.

그 때문인지 올해 초 미국에선 플라시보 전문약까지 등장앴다. 이 약의 이름은 플라시보(placebo)의 철자를 역으로 쓴 ‘오베칼프’(Obecalp)였다. 플라시보로 사용되는 것은 인체에 무해한 것들이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외과 김충현 교수는 “설탕·유당·녹말 등을 원료로 해서 만든 알약이나 비타민 등이 진짜 알약 대신 사용된다”며 “주사약을 대신해선 증류수나 생리 식염수가 플라시보로 쓰인다”고 조언했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플라시보 약’을 환자에게 처방하는지
3개 대학병원 교수 10명에게 물었더니

▶ 외과 K교수: 말기 암환자의 통증 치료에 플라시보 약을 자주 이용한다. 효과도 있다.

▶ 재활의학과 P교수: 플라시보 효과는 환자가 약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가능하다. 의약분업 전엔 가끔 썼으나 분업 후엔 거의 처방하지 않는다

▶ 신장내과 K교수: 전공의 시절에 마약 중독 환자에게 플라시보약(생리식염수)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은 안쓴다.

▶ 가정의학과 H교수: 환자에게 모든 약을 공개한다. 플라시보 약은 쓰지 않는다.

▶ 가정의학과 K교수: 고혈압 등 만성질환, 불안·우울 등 정신질환, 만성 통증 환자에게 플라시보 약이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 소화기내과 C교수: 소화기내과엔 기능성 질환이 거의 없어서 플라시보 효과를 치료에 활용하는 경우는 없다.

▶ 내분비내과 L교수: 혈당이 떨어져야 하는 당뇨병에서 플라시보 효과는 없다.

▶ 신경외과 J교수: 산업재해 환자나 교통사고 환자의 꾀병을 감별할 때 간혹 플라시보 약을 쓴 적이 있다.

▶ 정신과 L교수: 주로 통증을 호소하고 다량의 진통제나 신경안정제를 요구하는 환자에겐 플라시보 약을 처방한다.

▶ 정신과 L교수: 약을 다량 복용해야 안심이 되는 노인에게 플라시보 약(약의 갯수를 늘림)은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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