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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5> 董壽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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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6세의 나이에 자택에서 작품에 열중하는 둥서우핑. 김명호 제공

둥서우핑(董壽平:1904∼1997)은 베이징동방대학 경제학과 졸업 후 군벌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상인으로 변장하고 베이징을 탈출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산시(山西)성 훙둥(洪洞)현의 서향세가 출신이었다. 역대 명인들의 서화와 도서 문물 10여만 점이 집안에 있었다. 방안에 틀어박혀 명필들의 비첩을 뒤적거리다 직접 붓을 들기 시작했다.

1928년 베이징은 허베이(河北)성 성도(省都)가 되면서 베이핑(北平)이 됐다. 성 정부가 현장(縣長) 임명장을 보내왔다. 그의 나이 24세, 부임했다면 최연소 현장이었다. 어느 외국인 수장가의 “현대 중국화는 그림 축에도 못 낀다”는 말이 청년 둥서우핑을 자극했다. 현장 부임을 거절하고 서화에만 매진했다. 명인들의 작품을 구입해 감상하고 연구하고 임모(臨摹)했다. 10년 후 베이핑 화단(畵壇)에 확실한 자리를 구축하자 베이핑을 떠났다. 항일전쟁 폭발 직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쓰촨(四川)성에 도달했다. 회화의 대상인 자연의 관찰과 체험이 목적이었다. 사시사철 산속을 헤맸다. 해마다 정월이 되면 매화의 피고 지는 전 과정을 가슴에 담기 위해 눈밭에서 날을 지새웠다. 발에서 동상이 떠나지 않았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죽림도 간과할 수 없었다. 봄이 되면 죽순이 돋아나는 과정을 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쭈그리고 앉아 일어설 줄 몰랐다.

그는 송(松)·죽(竹)·매(梅)·황산(黃山)을 수묵으로 표현했다. 문화혁명 시절엔 아름다운 조국의 산하를 시커멓게 만들려는 인물로 낙인찍혔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날벼락이었다. 매일 빗자루 들고 거리를 청소하고 석회 포대를 날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문혁이 끝난 후에도 혹시 몰라서 한동안 일을 계속했다. 충격의 여파는 화풍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묵은 거들떠보지 않고 울긋불긋한 채색화만 그렸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의 매력은 인격에 있었다. 대학 시절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낼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고향 갈 차비 30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가 필요한 액수를 주머니에서 꺼내주다 보니 나머지 돈까지 묻어 나와 버렸다. 돈을 받은 친구는 달아나듯 가버렸다. 그해 여름 둥서우핑은 고향에도 못 가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인격자의 기본조건 중 하나인 무모함을 젊은 시절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의 그림을 한 점 구하기 위해 돈을 싸들고 갔다가 차 한 잔 대접 못 받고 쫓겨난 사람은 부지기수였고, 진귀한 문물을 싸들고 온 사람들에게는 “박물관에 갖다 줘라”며 면박을 줬다. 그러나 60여 년간 재난복구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전시회와 자선행사에 그의 그림이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1942년부터 3년 동안 서화를 판 돈으로 항일전쟁을 지원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예술가의 청년 시절은 미련할 정도로 고지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재치가 번득이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중국 관련 뉴스를 보다 보면 중국 지도자와 국빈들이 기념촬영을 위해 베이징 인민대회당이나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 죽 늘어선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뒤에 걸린 만리장성이나 황산 같은 대형 그림의 대부분은 둥서우핑의 작품들이다.

한국과도 인연이 많았다. 집안에 한국 관련 고문헌 자료가 많았고 시인이었던 조부 둥원환(董文渙)은 조선에서 온 사신들과 시를 많이 주고 받았다. 둥서우핑은 이것들을 모아 『한객시존(韓客詩存)』을 편찬했다. 아버지 성격을 잘 아는 자녀들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고문헌들을 한국에 그냥 줄까 봐 가급적이면 한국인들을 못 만나게 했지만 지곡서당의 임창순 선생과는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편지가 왔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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