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봉주의 후쿠오카 마라톤 制覇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봉주를 본받자.”“우리 민족엔 이봉주 특질이 있다.” 친구나 이웃을 만나면 서로 이렇게 말함으로써 감격에 겨운 인사를나누자.이봉주의 이번 후쿠오카(福岡)국제마라톤 승리는 한국 사람들의 요즘 말라가고 있는 자신감에 새 물을 공급하는 구체적 샘이 되었다.
황영조의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 덕분으로 우리나라 마라톤은 오랫동안 실의에 잠겨 있다가 승리의 혼에 단번에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그 후 이봉주 선수가 지난 여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2위를 차지하자 우리는 기쁘면서도 불길한 분 석에 우려를감출 수 없었다.다 이겨놓은 게임이었는데 막판에 우승자리를 내주고 만 것은 최종 순간에 단거리 선수처럼 스퍼트할 뒷심이 우리나라 마라토너에겐 없다는 사실의 발견이 그 이유였다.그러나 이 괴로운 예감을 어제 이봉주의 역주 (力走)를 2시간여 지켜보면서 우리는 일소(一掃)할 수 있었다.
다섯명 선두그룹에 섞여 뛰다가 31㎞ 쯤에서 이봉주가 선두로제치고 나가던 때에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그러다가 38㎞에서 스페인의 후스다도 선수가 이봉주를 추격하자 우리는 다시 악몽의엄습(掩襲)을 받아야 했다.애틀랜타에서 남아프 리카공화국의 투과니 선수에게 당했던 그 악몽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41㎞에서 후스다도를 뒤로 물리고 다시 이봉주는 스퍼트했다.
우리는 이봉주가 이번 장도에 오르며“오로지 우승뿐,누구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읽은 것을 기억해냈다.그러나 경기는 엎치락 뒤치락,후스다도 선수는 스타디움 안 트랙에 들어와 다시 1까지 바짝 추격했다.
이것을 다시 스퍼트해 따돌리는 이봉주를 보며 마라톤의 이러한.공포'를 맛보기 보다 그 이기는 주인공이 바로.짝눈'에다.짝발'에다.20대 대머리'에다.엉망 치아(齒牙)',이 모든 핸디캡을 갖춘 한국청년 이봉주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 하고 또 감격했다. 이봉주의 후쿠오카 쾌거를 정치.경제.사회.문화,이 모든 면에서.구성의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우리 자신을.한국의 실패'에서 구원해내는 하나의 계기로 삼았으면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