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人譜 10~12권 펴내는 고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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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시 쓴다는 것은 인간과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 아니겠습니까.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어둠 속에서 밝은 세계로 드러내는 것이지요.사물이나 사상이 아니라 시로써 인간 자체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시가 인간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인 고은(高銀.63)씨가 이번 주말께.만인보(萬人譜)'10,11,12권을 펴낸다..만인보'는 제목 그대로 1만명의 인물을 시로 형상화시켜 보겠다고 86년부터 시작한 .인물연작시'다.이 작품 구상은 80년 벽두 남한산성밑 육군교 도소에서 했다.내란음모죄로 걸려들어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한계상황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빛 한줄기 안들어오는 이 감방에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시인이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시로써 빛을 줘 현재화시키리라고.그래서 1 2권까지 1천3백여명에게 빛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저 파미르 고원을 넘어/힌두쿠시를 넘어/아흐 숨막혀라/청룡도 번쩍 뽑아들어/아라비아 사막 사라센제국과 맞닥뜨린 사람이 있다/그가 고구려 유민의 자식 고선지였다//당 현종은 장안 가까이/화청지에 납시어 자욱한 연꽃 바라보며/황금 술 잔을 들어올리는데//바로 그 시각/먼 서역의 고선지는 모래바람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그의 천리마 비지땀 번드르르 흘리며”(.고선지'전문) 고구려 후손 고선지의 기개가 시로써 그대로 살아나고 있다.고선지에 대한 구구한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우리들앞에 북방 기마민족의 기개가 그대로 턱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아흐숨막혀라'는 허사를 통해 초원과 사막을 달리는 고선지 는 시인과 그대로 일치된다.
“하늘 아래/이런 진인 계시어라/질척질척하게시리/함박눈 퍼부어/퍼붓자마자 녹아//거기 오랜만에 주저앉은/늙은 황소의/두 눈 지그시 감겨/그 언저리 숨겨진/엉뚱하게시리/젊은 진인 계시어라” 소설가 이문구씨를 대상으로 한 시.이문구'전문이다.대상인물의 점잖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지 그냥 진짜 사람다운 사람 .진인'으로 불러버리고 만다.이씨를 대해본 사람이면 그 점잖음과 엉뚱하게도 속세와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같 은 탈속에 주눅들어 뭐라 형용할 수 있는 말 찾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다.그냥 이 시대로.진인'이라 할 수밖에.그러면서도 이 시의 어투는 李씨의 고전적 소설투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高씨는 주위의 문인과 역사적 인물뿐 아니라 70년대를 살았던정치인.문화계 인사,그리고 이름없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시적 대상인물의 선별기준은 물론 없습니다.그 인물을 통해 시대상과 함께 삶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내 시로 들어오고 있습니다.단 인물을 대상으로 하므로 절대 내 주관에 흐르지 말자고 맹세하고 있습니다.주관 대신에 저 자신을 무사(無私)하게 닦아 직관이 발동돼 시를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처음 1만명을 목표로 시작한 .만인보'는 전 30권,3천5백명 정도에서 마무리짓겠다고 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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