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골든 볼'수상 유고 용병 라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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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난생처음 한국땅을 밟은지 4년5개월.
포항아톰즈의 라데 보그다노비치(26)는 올해 한국 프로축구 출범이래 14년동안 한번도 오르지 못한 희망봉에 발을 디뎠다.
이른바 10-10클럽(한시즌 정규리그 10골.10어시스트 이상).그러고도 몇 걸음을 더 달렸다(11골.14어시 스트).
18일 라데가 수상한 골든 볼(KBS.일간스포츠 공동제정)은그가 일군 업적에 대한 당연한 축복이었다.그러나 포항이 잔뜩 눈독을 들여놓은 라피도컵 우승대열에서 탈락,초상집이 되는 바람에 라데로선 웃음을 아낄 수밖에.그나마 한결 누 그러진 편이다.후기우승의 최대고비였던 전남드래곤즈와의 경기(10월30일)에서 1-1로 비긴 이후 며칠동안 라데는 괴로움속에 나날을 보내야 했다.그를 귀화시켜 월드컵에 내보내야 한다는 말은 쏙 들어가고 포항에서마저 쫓아내야 한다는 분 노가 들끓었다.못한 것도아니었다.그가 얻어낸 페널티킥이 아니었다면 지는 게임이었다.
결국 분노는 한없는 애정과 기대의 표현이었다.92년7월 입단,93시즌 득점 3위(9골),94시즌 득점 2위(22골).베스트11.해트트릭 3회,95시즌 8골.6어시스트,그리고 올해 역사적 10-10클럽 가입….그를 기분좋은 날의 칭 찬보다 우울한 날의 성토대상으로 바꿔놓은 건 바로 이같은 빼어난 「과거」였다. 끊임없는 귀화설의 뿌리도 그것.그의 답변은 복잡하다.『태극마크 OK,귀화 NO.』월드컵같은 큰물에서 뛰고 싶지만 조국(유고)도 버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두살아래 부인(알렉산드라)과 함께 밤이면 신문이란 신문은 샅샅이 뒤져 라데기사를 오려내고 방송에 난 기사까지 녹화해 유고로 보내고 있는 것은 유고대표로 뽑아달라는 진한 유혹이다.사라예보의 카신도병원에 2천만원을 기증하고 베오그라드에 아파트를 마련한 것도 「돌아갈 조국」을 염두에 둔 몸짓이다.
사실 그가 등진 것은 조국이 아니라 전쟁이었다.82년 사라예보 엘렉트리체스카보통학교 유니폼을 입고 87년 유고 1부리그 중하위권 젤레즈니차르(사라예보 소재)에 입단,91시즌을 마칠 때까지 그의 꿈은 유고명문 레드스타 혹은 파르티잔 을 거쳐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아울러 마르코 반 바스텐(네덜란드)같은 대스타를 꿈꿨다.그에게 92년초 파르티잔행이 트인 것이다.
꿈을 안고 달려간 베오그라드.그러나 「때」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4월)하면서 유고는 내전.곧이은 국제사회의 유고제재.먹구름은 축구까지 덮쳤다.유고대표팀은 물론클럽팀도 국제대회 출장불가.
***[ 37면 『라데』서 계속 ] 문닫을 판에 라데를 챙겨줄 파르티잔이 아니었다.6월예정 결혼도 기약없이 연기됐다.그때매니저를 통해 전해들은 곳이 한국.「축구」만 있다면 군말이 필요없었다.한국행 이틀전에야 당시 대우에서 뛰던 우치체비치에게 한국과 한국축구에 대해 귀동냥했을 정도.그런 그가 악바리인 것은 당연했다.누구나 인정하는 테크닉은 접어두고.거칠기로 소문난한국수비수들도 고개를 흔들 만큼 살벌한(?) 투지,게다가 보신탕.꼬리곰탕을 먹어치운 먹성.갈곳 모르던 라데가 한국축구의 큰별이 되 는 데엔 이것들도 큰 힘이 됐다.리그우승을 놓친 그의머릿속엔 이제 아시아클럽컵과 97시즌 라피도컵이 똬리를 틀었다.그러면 용병 최초 최우수선수(MVP) 영광도 라데의 품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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