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방향은 맞는데 왜 공감을 얻지 못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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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 나가 당면한 경제위기 극복에 정치권이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의 위기로 파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확대 편성한 내년 예산안 통과에 국회의 협조를 당부하는 시정연설에서다. 이날 이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시기적으로 시의적절했고 내용 면에서도 위기극복의 방안과 각오를 잘 담아낸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감동이 없었다. 대통령과 정부를 믿고 따르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지 못했다. 당분간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면 머지않아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란 희망을 심어주지 못했다. 한국은행은 이날 기준금리를 사상 최대폭인 0.75%포인트 내리는 특단의 금융지원책을 내놨지만 금융시장의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에 11년 전 외환위기와 같은 위기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동안 악화됐던 외화 유동성 문제는 충분히 감당할 만하고 앞으로 외환 사정이 호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시장이 불안에서 벗어날 때까지 선제적이고(preemptive), 충분하며(sufficient), 확실하게(decisive) 원화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와 함께 실물경제의 침체에 대비해 재정지출을 대폭 확대하고, 수출 부진에 대응해 내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선제적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현재로선 위기상황을 맞아 정부가 할 수 있는 합리적 대응책은 망라적으로 거론한 셈이다. 우리는 이 대통령의 이 같은 위기 극복 방안이 원칙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그런데도 국민과 시장에 별다른 호소력을 갖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동안 쌓여온 리더십의 부재와 신뢰의 상실 때문이다.

우선 이 대통령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독 우리나라에 더 큰 파장을 몰고 온 데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위기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정부의 대처가 미흡했던 점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성이 없었다. 경제팀의 불협화음과 정책 실기(失機)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동안 왜 정부의 각종 대책에 국민과 시장이 신뢰를 보내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빗발치는 경제팀 교체 요구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동안 정부는 아무런 잘못을 한 게 없고, 작금의 위기는 모두 외부에서 비롯됐을 뿐’이라는 현실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내 탓은 없고 온통 남의 탓뿐이다. 그러니 위기대응에 대한 반성도 없고 경제팀을 바꿔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인식으로는 아무리 올바른 대책을 내놔도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국민과 시장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리더십이 실종된 마당에 무슨 말이 먹히겠는가.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는데 무슨 대책이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이 판에 “이번 위기가 끝나면 각국의 경제순위가 바뀌고 대한민국의 위상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 대통령의 희망 섞인 전망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위기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그 사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장밋빛 낙관만으로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순 없다.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위기 극복의 길은 더욱 길고 험할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리더십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러자면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정부의 현실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위기상황을 타개할 만한 든든한 리더십이 현 경제팀에 없다는 사실부터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를 회복하고 리더십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또 신뢰와 리더십이 다시 서야 정부의 각종 대책도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위기 극복의 시기도 앞당길 수 있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대처가 필요한 법이다. 원론적인 몇 마디 말보다 분명한 행동 하나가 국민을 감동시키고 국민의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다. 지금은 일반 국민은 물론 야당까지 아우를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 앞장서서 책임을 지겠다는 책임의 리더십, 그러고 나서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당당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