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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습지를 소심하게 관리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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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습지가 주요 문명의 산실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세에 들어 대규모로 파괴됐다. 미국의 경우 유럽인이 이주해 간 후 습지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고,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역시 일제 이후의 기록만 살펴봐도 서해안 갯벌의 3분의 1 이상이 매립으로 사라졌다.

습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한 생태계란 것을 알게 된 게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유럽과 북미의 과학자들은 습지의 여러 가치를 과학적으로 규명했고, 이에 근거해 선진국에서는 남아있는 습지를 보전하고 파괴된 것을 복원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습지의 가장 큰 중요성은 다양한 생물이 서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상과 물에서 사는 생물들이 공존할 뿐만 아니라 고유하고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한다. 미생물 또한 다양하고 독특하다. 습지는 ‘생물다양성의 백화점’이라 불릴 만한 생태계다. 또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철새의 중요한 서식처여서 ‘람사르 협약’이라는 습지보호 국제협약까지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습지는 홍수 시 넘치는 물을 가두어두고, 가뭄 때는 건조해진 지하수와 토양을 적셔주는 스펀지 같은 작용을 한다. 몇 년 전 태풍 카트리나의 피해로 미국 뉴올리언스가 물에 잠긴 것은 둑을 높이 쌓지 못한 탓이 아니라 완충작용을 할 습지를 없앤 게 주원인이었다는 분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셋째, 습지는 수질정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하수처리장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습지를 ‘생태계의 콩팥’으로 부르는 이유다.

넷째, 습지는 생태공원이나 자연학습장으로서의 심미적·교육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생태파괴의 첨병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광고에서조차 습지 사진을 전면에 내놓는 요즘의 유행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습지의 파괴를 막고 더 나아가 이를 복원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우선 습지보호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적 압력이 필요하다. 기존의 ‘습지보존법’을 강력하게 운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습지 총량제’ 같은 제도의 도입도 고려할 시점이다.

습지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동의 역시 중요하다. 이는 습지에 대한 전문적인 학술연구와 대중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 습지보호는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해야 하며 얻어진 정보는 학생과 일반 대중에게 자세히 전달돼야 한다.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습지 연구·보호정책도 당연히 개발돼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내륙습지의 대표 격인 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또 국제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은 서해안 갯벌을 어떻게 관리·보존할 것인가도 꼭 해결해야 할 점이다.

습지의 단순한 보존을 넘어 지속 가능한 녹색성장과 연계할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습지의 국제협약인 ‘람사르 협약’에서도 습지의 현명한 이용(Wise Use)을 강조하고 있다. 지역 주민과 국가의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이익과 부합되지 않는 보존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소심하다는 것은 ‘대범하다’의 반대로 부정적인 의미다. 그러나 한자권 국가에서는 ‘소심’이 ‘조심하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국내 습지 보존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면 ‘대범한 경제개발’ 대 ‘소심한 환경보호’라는 두 평행선의 싸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범하게 파괴한 습지가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가져다준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이제는 습지를 ‘소심’하게 관리하고 이용할 시기가 도래했다.

강호정 연세대학교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