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니는 캐라, 몇년 후에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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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97년 외환위기사태 직전에도 경제 상황에 대한 우려가 높았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위기를 경고했고, 언론들은 정부의 안이한 인식과 정책 오류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와 여당은 이런 지적을 외면했다. 대비는커녕 비판 입막음과 정부 홍보에 급급했다. 그 결과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당시 상황을 연상케 하는 걱정스런 현상들이 재연되고 있다.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위원장은 엊그제 강연에서 경기 침체와 정부.여당의 안이한 대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일부 언론을 겨냥해 "자기들만 나라를 걱정하는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혹평했다. 심지어 "니는 캐라(너희들은 떠들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李위원장이 누군가. 노무현 대통령의 판단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발언은 대통령의 의중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런 인물이 '나만 옳다'고 강변하면서 외부 비판에 강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는 "역대 정권은 선거를 앞두고 경기부양을 했지만 우리는 안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해 두차례 추경과 올 초 총선 직전 서둘러 발표된 신용불량자 구제책은 선심성 정책이 아니란 말인가. 李위원장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란 독선과 다름없다.

기업과 국민은 盧대통령과 여당이 경제 난국을 헤쳐나갈 리더십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李위원장 같은 대통령 주변사람이나 주요 여당인사들이 하나같이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재계의 하소연은 '엄살'로 치부하고, 성장을 강조하는 사람은 '반개혁 세력'으로 규정짓고 적대시해선 불안심리가 해소되지 않고 경제가 살아나지도 않을 것이다.

李위원장은 '몇 년 후에 보자'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와 국민을 대상으로 그런 실험을 할 상황이 아니다. 수렁에 빠진 뒤 누가 책임질 것인가. 盧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인식이 이런 식이어선 경제가 회복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