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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도>30.액션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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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금은 미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기도 한 액션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출세작 『더티 하리』 시리즈의 주인공인 형사 더티 하리가 70년대 극우주의자의 윤리를 지나치게 대변한 인물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형사 더티 하리는 도시의 외로운 늑대요.』 그가 액션영화 『더티 하리』에서 강조한 부분은 범죄자를 처단하는 폭력적 줄거리가 아니라 남자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다시 말해 주먹과 총이 은색 스크린을 몰아치는 액션물의 기본요소는 바로 그 역동적인 화면 배후에 숨은 남자의 내적 갈등이란 설명이다.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외로운 총잡이처럼 「반사회적(외로운)이고 잔인한(늑대)남자」,즉 독불장군형 인물에 대한 고민에서 액션영화는 출발한다. 할리우드 액션과 홍콩의 무협물에 익숙한 오늘의 젊은 관객들은 한국엔 액션영화의 전통이 없다고 여길지 모른다.실제로 비디오가게에 가보면 한국영화 가운데 90년대 이전의 액션영화는 거의 찾을 수 없다.『한국영화 70년-대표작 200선 』(89년.집문당 간)에 실린 2백편의 영화 가운데에도 『돌아오지 않는해병』류의 전쟁영화를 빼놓고는 액션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한편도 없다.하지만 한국영화계를 액션의 불모지로 단정하는 것은오류다.『한국영화자료편람』(77년. 영화진흥공사 편)은 한국영화의 전성시대였던 60년대 내내 액션영화가 멜로드라마 다음으로많이 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69년 한햇동안 만들어진 액션영화만 해도 55편에 이른다(멜로드라마는 1백6편).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는 박노식,「김마담,이번 일만 잘 되면…」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았던 허장강,싸늘한 눈빛과 냉혹한 미소의 장동휘등은 60년대의 영화적 기호로 각인된 액션 스타였다.
70년대 초반에는 한국.홍콩 합작의 형태로 액션의 명맥이 이어졌지만 곧이은 유신의 공포정치는 한국영화의 남성성을 거세해버렸고,이후 관객들은 울고 짜는 멜로드라마에만 길들여지도록 강요받았다.액션영화의 전통은 단절됐고,그나마 작품마저 남아있지 않아 이 시대의 액션이 어떤 성취에 이르렀는지 판단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형편이다.사회성 드라마의 실종과 함께 액션물의 오랜 동면은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불행 가운데 하나였다.90년대 들어 충무로에서 액션영화 제작의 계기 를 제공한 작품은 3편까지 개봉됐던 임권택감독의 『장군의 아들』이다.일개 깡패(박상민)가 민족적 대의에 눈떠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그러나 액션물이라기보다 임권택감독 특유의 휴머니즘적 개성이 짙게 밴 시대극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충무로적 장르가 되려면 인물.이야기 구성.화면등에서 속되게 말해 「베낄만한」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액션물의 전형을 제시한 영화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우리 영화의 전성기이자 액션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이후 잠자고 있던 충무로 액션물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다시 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이 영화 개봉이후 충무로는 멜로.코미디 뿐만 아니라 액션물도 흥행이 된다는자신감을 갖게 됐다.
한국 관객들에게 액션영화의 매력을 환기시킨 또다른 공신은 80년대 말부터 집중 개봉된 홍콩누아르 폭력물이다.어둡고 검은 화면이 특징인 5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프랑스어로 검다는 뜻) 형식에다 30년대 갱스터 영화의 반사회적 인 물등을 혼합시킨 홍콩의 이 잡종장르를 두고 언론은 「홍콩누아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충무로에서 제작된 액션영화 가운데 이런 장르적 특성을 차용해흥행에서도 일정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는 장현수감독의 『게임의법칙』(94년)이 꼽힌다.이 영화는 몇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액션영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서 주목할만했다.시골 출신의 건달(박중훈)이 비정한 뒷골목 세계에서 입신하려다 처참한 최후를 맞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장현수감독은 홍콩누아르의 영화적 관습을 다수 끌어오긴 했지만 비장 일변도의톤을 버리고 주인공을 코믹하게 성 격화함으로써 폭력적 현실의 비극성을 더 강화했다.룸살롱에서의 피투성이 격투장면도 적어도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과격하고도 생생했다.
『게임의 법칙』은 그해 한국 영화 가운데 흥행 8위(13만명)를 기록했다.
홍콩누아르는 TV에도 큰 영향을 미쳐 액션 드라마 『모래시계』(김종학연출.95년)가 등장하게 됐고,같은 시기에 발표된 김영빈감독의 『테러리스트』는 관객 34만명(95년 흥행 2위)을 동원하며 액션물도 흥행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충무 로의 기대감을 재확인했다.『테러리스트』가 개봉된 뒤 비로소 액션물은 충무로에서 로맨틱 코미디 다음으로 주목받는 장르가 된다.빗물에 대한 프로이트적 집착, 「카인과 아벨」모티프의 변주,폭력적이지만 동정심을 유발하는 금욕적인 남자주인공 (최민수),법을 지켜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선(善)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는 반사회적 가치관등,이 영화는 『모래시계』와 더불어 홍콩누아르적 문법을 충무로에 이식하며 액션물 제작을 촉발시킴은 물론 다른 장르에까지 짙은 영향을 미쳤다.
『본 투 킬』(장현수감독).『피아노맨』(유상욱감독)등 폭력물영화가 올해들어 부쩍 많이 개봉됐으며 코미디에 액션 요소를 대폭 끌어들인 『돈을 갖고 튀어라』(김상진감독).『투캅스2』(강우석감독),그리고 멜로와 액션을 혼합한 『런어웨 이』(김성수감독)까지 등장한다.또 『리허설』(강정수감독)같은 에로물도 초반부는 액션물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이 제 액션물을 배제하고는 충무로 영화를 말하기 어렵게됐다(기술적으로는 추적장면에서의 스테디캠,그리고 크레인 사용이빠지지 않는 요소다).
충무로 영화의 태반이 감독의 영화이기보다 기획가의 영화라고들하지만 액션물만큼은 여전히 감독의 입김이 더 셀 수밖에 없는 장르다. 열악한,혹은 지나치게 편협한 우리의 영화자본을 고려하면 제작비가 많이 드는 액션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모험으로 비친다.그러나 주인공의 인물 설정같은 2차적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영화 만들기의 기본기를 닦고,또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영감을얻을 수 있는 교과서적인 장르는 액션영화임이 분명하다.이 장르에 대한 천착 없이 영화 만들기의 발전을 기대한다면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되기 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액션영화는 지금 외국 형식을 베끼는 수준에 겨우 머물러 있다.그러나 액션물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의 고질적 약점이기도 한 이야기 서술의 어색함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허점 많은 시나리오에,사람에 대한 고민은 제쳐두고 사건만 나열한 폭력 액션물만을 생산해낸다면 「아시아에서 일본.중국,다음으로는 한국」이란 세계 영화계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은점점 더 먼 미래로 연기해야 될지도 모른다.우리는 이미 홍콩.
대만에 따라잡혔고 필리핀.베트남등 동남아 국가의 추격까지 받는위기에 몰려 있다.
□한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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