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거리엔 선율 길위엔 뮤즈-손수레 테이프장사 神인가 癌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거리가 잠시 뜸해진다.한낮내내 시달렸던 차량행렬에서 벗어나는모습을 보이는 것이다.엷은 어둠이 잿빛 콘크리트덩어리의 살풍경을 가려줄 무렵 은근한 불빛 사이로 젊음이 꿈틀거린다.
박성시(22)군의 하루도 이때 비로소 시작된다.평일 오후6시,주말에는 정오무렵 박군은 어김없이 손수레를 종로2가로 밀고 나간다.박군이 가진 직업의 공식호칭은 「불법복제 카세트테이프 판매업자」.소위 「구루마 테이프장사」다.
박군과 같은 「구루마장사」가 사용하는 유일한 호객수법은 음악을 크게 트는 것.행인들은 음악에 이끌려 좌판을 기웃거리며 한두개씩 테이프를 고르게 된다.저녁무렵엔 신나는 댄스음악을 주로튼다.「이제부터 이 거리는 당신들의 소유니 맘대 로 즐겨보라」고 선포하듯이 쿵작거리는 리듬이 온 거리를 울린다.이후 오후 8시쯤이면 연인들의 시간.음악리듬도 분위기에 맞게 느려진다.드라마 『애인』의 주제가 「아이 오우 유」같은 노래가 집중적으로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이때다.오후1 0시30분에서 좌판을 접는자정 무렵까지를 장식하는 것은 록음악.술기가 오른 행인을 붙잡는데는 격정적인 록만큼 좋은 음악이 없기 때문이다.시간대에 따라 무드를 바꾸는 이들.삭막한 도회의 거리를 음의 세상으로 흔들어 놓는 이들에게 「 길위의 뮤즈」라는 별명을 붙여준다면 과찬일까.손수레 행렬은 종로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대학로.신촌.명동.강남역 등지에 터를 잡고 있다.대부분 20세안팎인 이들에게는 비슷한 고민이 있다.신촌에서 만난 이모(20)군은 『장사한지 6개월이 지났어도 아직 손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부끄러워서다.『내 또래의 다른 젊은이들이여자친구에게 테이프를 골라주는 모습을 보면 왠지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선율속의 긴장감.바로 단속반과의 신경전이다.노점이야 어떻게든 허가를 얻는다 하더라도 판매하는 테이프는 명백한 불법복제물이기에 숨바꼭질을 계속해야 할 판이다.대부분이 문화체육부나 검찰의 단속반에 적발된 경험이 있다.적발될경 우 「밥줄」인 테이프를 모두 압수당하게 된다.
그래도 이들은 거리로 나온다.단지 하루 밥벌이만을 위해서는 아니다.대학로에서 2년째 장사하고 있는 서모(22)군은 『그저음악이 좋다.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한국 음악산업에서 빼놓을 수없는 존재 아닌가』라고 주장한다.하루에도 수십 명의 가수가 새로 등장하고 음반이 발표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가이드역할을해주고 있다는 말이다.이름하여 「길보드 차트」.미국의 권위있는대중음악 업계지 빌보드의 랭킹차트에 비유한 말인데 그 영향력을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항상 「한국음악산업을 좀먹는 암적 존재」라는치욕의 수사가 따라다닌다.스산하기만 한 도시의 풍경에 던져주는리듬과 불치(不治)의 암.그 상관관계는 과연 어떻게 그려질 수있을까. □ 문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