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오케스트라 “프로 안 부러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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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덕분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인기가 급상승 중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에 도전할 수 있는 이곳은 지금 ‘취미로 연주하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악기를 들고 찾아오는 주부, IT 산업 종사자, 대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지원자를 가려서 받아야할 정도가 됐다”라는 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아줌마 오케스트라’의 분당 연습실은 이제 두세 명도 더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꽉 찼다. 동사무소 지하, 단원들의 집 등을 전전하며 연습하던 시절을 거쳐 창단 7년 만에 마련한 보금자리다. [김상선 기자]


◆주부 오케스트라의 뚝심=분당 정자동 한 주택 지하에는 주부들만의 특별한 공간이 있다. 132㎡(약 40평) 남짓되는 이곳은 매일 오전 10시쯤이면 남편과 아이로부터 잠시 숨을 돌린 60여 명의 주부들로 가득 찬다. 30대 초반에서 60대까지의 주부 오케스트라, ‘민트 오케스트라’의 전용 연습실이다.

한 백화점의 문화센터 악기 강습반에서 처음 만나 합주를 시작한 주부들은 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며 아이를 키웠고, 음악에 대한 꿈을 되살렸다. 분당 지역 주부만 모였던 오케스트라에 이제는 강원도 춘천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단원까지 생겼다. 이 오케스트라의 단장인 정소연(45)씨는 대학 시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하지만 결혼 후 악기를 잡을 시간은 없었다. “아들을 중학교에 들여보내고 나서, 내 인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에요.” 그래서 아이의 대학 입시를 치르면서도 일주일에 두 번있는 연습은 절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에게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실패했을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 활동 덕에 ‘쿨하게’ 입시를 치렀죠.”

‘민트 오케스트라’는 최근 입단 신청을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특히 연주자가 몰리는 바이올린·첼로는 포화 상태다. 무대 위 한자리에 앉고 싶다면 호른·클라리넷 등 관악기를 배워보는 편이 유리할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이들이 요즘 연습하고 있는 곡은 브람스 교향곡 4번. 오케스트라 연주곡 중에서도 깊이·무게 있는 해석이 필요한 작품이다. 이달 25일 성남아트센터에서의 아홉번째 정기 연주회를 앞두고 있는 단원들은 “2000년 창단 이후 오케스트라에 매달린 아줌마들의 뚝심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된 곡”이라고 입을 모았다.

◆테헤란에도, 구로에도 ‘오케스트라 열풍’=직종에 따라 모인 오케스트라도 북적이긴 마찬가지다. ‘테헤란 밸리 오케스트라’는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의 정보기술(IT) 기업, 금융권 종사자 등 40여 명이 모여 2001년 만든 단체다. 딱딱하고 분주한 이 지역에 음악의 여유로움을 이식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8년 동안 꾸준히 정기 연주회를 열자 가입 문의가 줄을 이었다. 현재는 의사·회계사,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150여명의 단원에게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취미로 첼로를 연주하다 아예 진로를 바꿔 악기 제작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떠난 단원까지 생겼을 정도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연주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2006년 만들어진 ‘구로 디지털밸리 오케스트라’의 원년 멤버 최우락(36·LG전자 연구원)씨는 “구로 산업단지 내에 단원 모집 전단지를 붙이러다니는 게 연습보다 더 큰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쉽게 생각하고 들어왔다 3개월을 못 채우고 나간 사람도 20명이 넘는다”며 “매주 월요일 오후 8시면 칼같이 시작되는 스케줄에 적응해야하는 것도 직장인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들려주었다.

◆“실력으로 말한다”=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오케스트라’다. 올해로 창단 80주년을 맞았다. 이들은 지난달 지휘자 정명훈과 한 무대에 올라 평양 어린이 병원의 기금 마련을 위한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정명훈은 당시 “음악을 향한 열정만큼은 프로를 넘어선다. 생각보다 훈련이 잘돼있는 오케스트라”라고 평했다.

올해 통영 국제 음악제에서 주목받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도 있다. 다양한 직업과 나이의 단원이 모인 ‘서울 커뮤니티 오케스트라’는 올 봄 이 음악제에서 ‘라이징 스타상’을 수상했다. 아마추어 연주단체가 참여한 프린지 공연에서의 돋보이는 연주 수준 덕이었다. 7명으로 시작해 충남·대구·경북 지부까지 둔 700여 명으로 발전한 ‘베누스토 오케스트라’도 아마추어 연주단체의 성공사례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 씨는 “아마추어 연주는 사회 구성원 차원의 ‘적극적인 음악 체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관객층이 얇다는 지적을 늘 받아온 한국 음악계에 좋은 신호”라고 풀이했다. 

김호정 기자 ,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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