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기업 하기 나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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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은 언젠가 "나는 친(親)노조도, 친기업도 아니다. 친경쟁력이 나의 노선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지당한 말이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한국경제가 강해지도록 경쟁력을 키우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표명이었다.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력이 약하면 기업도 노동자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을 새삼 일깨워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가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는 한국 대통령의 의지와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개혁의 기치 아래 신선한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로드맵도 수없이 만들고, 경제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경쟁력 강화에 불철주야로 몰두해 왔음에도 IMD의 평가는 왜 이다지도 야박한 것일까.

*** 인도에도 뒤진 국가 경쟁력

27개국(인구 2000만명) 중에서 한국은 겨우 15위. 경쟁력 평가는 잘사는 나라 기준으로 매기는 등수가 아니다. 지금 못 살아도 장차 싹수가 있는 나라의 순위가 높다. 다시 요약해 보면 대만(4위).말레이시아(7위).중국(10위).태국(11위) 등이 상위권에 포진해 있는가 하면 이번에는 인도(14위)까지 한국을 추월했다. 동북아 중심 국가니 허브니 하면서 장대한 포부를 펼치고 있는 참에 IMD의 이런 평가는 정말 김새는 일이다.

이들의 시각이 국내와 사뭇 다르다는 것도 주목거리다. 국내 분위기는 기업들 질타가 대세인 데 반해 IMD 평가는 한국 기업들 잘한다고 칭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노조가 득세하고 더 그래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내에선 높은 데 반해 밖에선 그것 때문에 한국경쟁력이 추락하고 있다며 점수를 깎아버렸다. 하여간 밖에서 한국을 어찌 보고 있나가 이참에 더 분명해졌다. 다른 항목은 몰라도 노사와 교육 경쟁력이 세계 꼴찌라는 지적이 뼈아프다.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나라에서 교육과 노사화합이 꼴찌라면 한국의 미래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

평가 시각이 다분히 기업 중심인 것도 사실이다. 기업 활동이 왕성한 나라에 높은 점수를 주게 돼있다. 돈벌이 잘되고 투자여건이 좋은 나라가 바로 경쟁력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요즘 한국 분위기로는 탐탁잖은 시각이다. 특히 노조 쪽에서 본다면 IMD는 기업들의 대변자요, 노조 탄압의 구실이나 만드는 제국주의자들의 바람잡이쯤으로 여길 것이다.

어쨌거나 경쟁력 평가란 외국 기업이든 자국 기업이든'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점수다. 그렇게 따진 결과 한국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기보다는 '기업 하기 나쁜 나라'쪽에 속한다는 판정을 받은 셈이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전임 김대중 대통령도 수없이 했던 다짐이다. 그때도 그의 말을 믿었던 사람이 매우 적었지만 지금 盧대통령의 그런 말을 믿는 사람은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전력을 봐도 盧대통령이 金대통령보다 더 과격하게 기업을 공격해 왔을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지지기반 또한 훨씬 반기업 정서가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말로는 대통령이든 정부든 여당이든 모두가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에 절대 찬성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더 정신차려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항상 따라붙는다. 최근 비정규직 문제나 공정거래 관련 법개정 문제 등이 모두 그런 맥락이다.

*** 기업에 투자 강요할 순 없어

그러나 문제는 당사자인 기업들의 생각이다. 노조가 아무리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됐다고 주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정작 기업주가 기업 하기 나쁜 나라라고 생각하면 그만인걸. 대통령이 "내가 왜 불안한가"라고 항변하는 것과 같다. 불안을 느끼는 주체는 盧대통령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아무리 "나는 불안하지 않다"를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일 아닌가. 기업들의 투자 역시 기업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다. 기업이 불안하다면 불안한 거다. 그들이 편하게 느껴야, 그들이 돈이 된다는 판단이 서야 비로소 투자를 결정한다. 비리를 들춰서 기업인들에게 수갑을 채울 순 있어도 투자를 강요할 수는 없다. 외국 기업이든 국내 기업이든 마찬가지다. 투자야말로 기업의 권한이요, 자유다. 그게 싫으면 자본주의를 그만둬야 한다. 그런 뜻에서 IMD 평가는 자본주의 경제의 성적표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