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죄도 생각하기 나름임을 보여주는 미개봉작 두편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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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살인과 범죄에 대한 사람의 인식차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조적인 미개봉 필름 2편이 출시됐다.사회적 관심과 예술적 감각을 균형있게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베르트랑타베르니에 감독의 95년작 『라파』와 조디 포스 터.이사벨라 로셀리니.마틴 신등이 출연한 컬트영화『시에스터』(87년 매리 램버트 감독).
『라파』는 살인강도를 아무런 가책없이 기능적으로 저지르는 청년 3인조를 다루고 있고 반대로 『시에스터』는 짓지도 않은 살인죄로 가책에 휩싸인 여인의 이상심리를 그리고 있다.
출발점과 접근방식은 상이하지만 두 영화의 결말은 한 곳에 모인다.온갖 범죄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마음가짐에서비롯되는 문제라는,평범하지만 자주 잊혀지는 진실의 확인이다.
『라파』는 84년 엽기적 강도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은 세 젊은이의 실화가 바탕.여주인공 마리 질랭은 유복한 가정을 뛰쳐나와파리의 하숙집에서 남자친구 2명과 동거생활을 한다.아무 생각없이 순간을 만끽하며 살겠다는 게 이들의 유일한 철학이고 꿈은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의류점을 차리는 것이다.
방탕한 유흥으로 생활비를 탕진하자 이들은 주저없이 강도단으로나선다.질랭이 어여쁜 외모로 남자를 유혹하면 무장한 두 남자가그를 덮쳐 돈을 챙기는 것.이들은 끔찍한 범죄를 아무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데다 범죄인에게 있을 법한 의리조 차 없다.
몇차례의 범죄 끝에 1차로 체포돼 공범을 털어놓은 질랭은 『범인들이 잡혔으니 전 집에 가도 되죠』라고 형사에게 묻는다.이런 모습들이 어떤 주석도 붙지 않고 지극히 냉정하게 조명된다.
꼭 신세대를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이미지 가 앞서는 거품식 생활방식의 한 끝에 어떤 함정이 놓여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힘있는 영화다.미끈한 망아지를 연상시키는 질랭이 철없는 강도단 미끼역을 잘 소화한다.제목「라파」는 「미끼」란 뜻의 프랑스말. 『시에스터』는 미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달에 있어서는 『라파』보다 혼란스러운 컬트풍이다.영화가 시작되면 비행기의 굉음이 요란한 활주로옆 풀밭에 피로 물든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쓰러져 있다.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스페인으로 날아온공중곡예사 클레어(엘렌 바킨 扮)다.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되살리다가 피투성이인 옷을 보고 『내가 살인을 했다』고 울부짖는다.
애인이 다른 여자(이사벨라 로셀리니 扮)와 사귀는 것을 보고그녀에게 강한 질투와 분노를 느껴 흉기를 휘두른 기억이 떠오른것이다.경악한 그녀는 애인의 집으로 달려가는데 그곳에는 자기가죽인 줄 안 여자가 경찰에 체포돼 막 나오고 있다.그 순간 클레어는 살인자는 여자였고 죽은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이 영화에서 스토리의 논리성과 사건의 시간적 배열은 중요하지 않다.감독은 화자의 생사를 뒤바꾸는 전복적인 구성을 통해 행위나 결과만으로 평가되는 세상사를 해체하고 마음이 만사의 근원임을 일깨운다.섬뜩한 음향과 예측불가의 편집이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 컬트영화팬들이 좋아할 작품.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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