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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위기라고만 하지 말고 대중들과 만날 기회 더 늘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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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살림만 했던 60대 주부. 40대 은행 지점장.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강사. 20대 대학 교무처 직원….

인문학의 보편성과 다양성은 서로 다른 직업·연령대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힘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인문강좌’에 지난 1년간 꾸준히 참석한 이들이 ‘인문학의 대중적 소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김성하(29·직장인), 김성빈(45·은행원), 김요숙(63·주부), 최수목(42·학원강사)씨.


지난 1년간 매주 토요일 오후 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의 ‘인문강좌’를 수강했던 이들의 면면은 이렇게 다양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요즘, 무엇이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았을까? 나이·직업·학력에서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들은 같이 다산의 경학(經學)에 대한 강의를 듣고,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었다. 지난 1년간 연인원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문강좌를 들었다. 이중 전체 강좌의 80% 이상 출석한 ‘개근생’ 15명이 대표로 지난 11일 ‘인문강좌 수료증’을 받았다.

이날 수료증을 받은 이들 중 4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김요숙(63·여·주부) ▶김성빈(45·은행원) ▶최수목(42·여·학원강사) ▶김성하(29·대학 교직원)씨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이들과 좌담을 가졌다. 대학과 학계의 울타리를 넘어선 곳에서 오히려 인문학은 활기찼다.

#‘글보다 말로’ 가까워지는 인문학

-1년간 같은 강의를 들었는데, 서로 안면은 있겠습니다.

▶김성하=다들 처음 보는 분들인데요. 강의마다 200여명이 몰렸으니 잘 모르는 게 당연하죠. 인문강좌엔 제 또래의 대학원생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르신들이 너무 많아 놀랐어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배우겠다고 모인 것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김요숙=나는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고 애들 넷을 키우며 살림만 했어요. 다만 매년 봄·가을로 간송미술관 전시회는 갔지요. 요새는 너무 빨리빨리 해치우는 세상이잖아요. 선조들의 그림을 보거나, 이런 강연에서 옛 지혜를 듣다 보면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겨요.

-전공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주제였을 텐데요.

▶김요숙=나이 육십이 넘은 나 같은 전업주부가 따라가기엔 어렵지요. 하지만 책을 읽는다고 해 보세요. 더 어렵지요. 직접 말로 풀어 설명해 주는 게 그나마 낫잖아요. 다들 인문학에 관심은 있는데 접하는 방법이 문제인 것 같아요.

▶최수목=강좌는 서울서 열리지만 수강생은 수도권 도처에서 와요. 어떤 30대 주부는 경기도 양주에서 버스·전철 갈아타며 먼길을 와서 열심히 듣더라고요. 지방에선 이런 강좌가 없어서래요. 인문학 강좌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아요.

#인문학이 소통하면 대중도 편견 깬다

-전공자들도 기피하는 인문학인데.

▶김성빈=경영학을 전공했고 은행에 다니고 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계속 있었어요. 요새 ‘소프트 파워’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게 국가 단위에서뿐 아니라 개인에도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더 느껴요. 회사 생활을 하면 다양한 고객을 만나게 됩니다. 인문사회 분야에 대해 두루 알고 있으면 고객의 관심사와 접점이 많아져요. 고객과 벽이 허물어지고 신뢰감을 쌓는 계기가 되지요.

▶최수목=강좌를 들으면서 플라톤의 『국가론』 몇 구절을 직접 읽을 수 있었어요. 어렵다거나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고전인데, 그 철학서가 정말로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더라고요. 인문학이 대중과 직접 대화하기 시작하면, 대중도 자기 안에 갖고 있던 인문학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요숙=강좌를 듣는 시간은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이란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도 김혜자씨가 ‘가출’을 한 뒤 집안 일을 떠나 읽고 싶은 책도 보고 그러잖아요.

#‘위기’만 거론 말고 대중 만날 ‘기회’ 만들라.

-인문학자들, 학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은.

▶김성하=인문학이 전공자만을 위한 학문은 아니잖아요. 대중과 학계가 소통하는 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요새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도 많은데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도 대중의 지성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대중들이 지적으로 뭔가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일들을 인문학이 해줬으면 하는 거지요.

▶김성빈=강좌를 들으면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인문학적 배경을 갖고 자신만의 관점이 생기는 게 재미있어요. ‘문화 콘텐트’에 대한 소비도 더 늘었지요. 다국적 기업에선 인문학자들도 많이 고용해 창조적인 작업을 하지 않습니까. 창의력·상상력을 키워주는데 인문학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김요숙=‘위기’ ‘위기’라고만 하지 말고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세요. 인문학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잖아요.

 글·사진=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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