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1916년 타이베이(臺北) 신뎬즈탄(新店直潭)의 어려운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차밭을 일궜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가족들이 굶기를 밥 먹 듯했다. 15세 때 학비가 없어 중학교를 그만 두고 조그만 쌀집을 열었다. 이 때부터 천재적 사업수단을 발휘했다.
단골이 쌀을 사는 시점과 월급 날짜 등 정보를 기록해 판촉과 수금일을 조정했다.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고객관리다. 당연히 고객들이 늘었다. 하루 12말 정도 팔리던 쌀이 1년도 안 돼 100말 이상 팔려나갔다. 모은 돈으로 정미소를 차려 재산을 불렸다.
대만 정부가 공업진흥책의 하나로 미국 원조자금을 활용해 석유화학 기초원료인 폴리염화비닐(PVC) 공장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54년 대만플라스틱을 창업했다. 이 회사를 50년대 후반 대만 최대의 민영기업으로 키웠다. 지난해 말 현재 대만플라스틱그룹은 30여 개 계열사에 9만50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자산은 1조5000억 대만달러(약 62조1400억원), 매출은 617억 달러(약 83조원)에 이른다.
그는 자신에겐 엄격했다. 새 양복 한 벌 걸치는 것을 사치로 여길 정도였다. 목욕 수건 1장을 30년 동안 사용할 정도로 자린고비였다. 전화비가 아깝다며 외국에 유학 간 자녀가 국제전화를 걸어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면서 편지지에 빽빽하게 글을 썼다.
글로벌 경제전쟁시대에 단 하루도 쉴 수 없다며 노익장을 자랑하던 그는 90세이던 2006년 6월 일선에서 물러났다. 후임에는 전문 경영인 출신의 리즈춘(李志村·70) 사장을 임명했다.
그에게 자식은 골칫덩어리였다. 영국 런던대학 화학박사인 맏아들 왕원양(王文洋·55)은 80년 귀국한 뒤 가업을 이어받을 것으로 기대됐으나 결혼 문제로 의절했다. 아들은 홍런(宏仁) 그룹 회장으로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