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중화권 ‘구두쇠 경영의 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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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5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숨진 대만 플라스틱 그룹(포모사그룹)의 왕융칭(王永慶·92·사진) 전 회장은 중화권 경제계에서 ‘경영의 신(神)’으로 불렸다. 동시에 ‘근검 절약의 상징’으로 통했다. 사업가로서 천재적 경영능력을 발휘했고, 사생활은 근검과 절약·근면으로 일관했다.

그는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1916년 타이베이(臺北) 신뎬즈탄(新店直潭)의 어려운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차밭을 일궜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가족들이 굶기를 밥 먹 듯했다. 15세 때 학비가 없어 중학교를 그만 두고 조그만 쌀집을 열었다. 이 때부터 천재적 사업수단을 발휘했다.

단골이 쌀을 사는 시점과 월급 날짜 등 정보를 기록해 판촉과 수금일을 조정했다.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고객관리다. 당연히 고객들이 늘었다. 하루 12말 정도 팔리던 쌀이 1년도 안 돼 100말 이상 팔려나갔다. 모은 돈으로 정미소를 차려 재산을 불렸다.

대만 정부가 공업진흥책의 하나로 미국 원조자금을 활용해 석유화학 기초원료인 폴리염화비닐(PVC) 공장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54년 대만플라스틱을 창업했다. 이 회사를 50년대 후반 대만 최대의 민영기업으로 키웠다. 지난해 말 현재 대만플라스틱그룹은 30여 개 계열사에 9만50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자산은 1조5000억 대만달러(약 62조1400억원), 매출은 617억 달러(약 83조원)에 이른다.

그는 자신에겐 엄격했다. 새 양복 한 벌 걸치는 것을 사치로 여길 정도였다. 목욕 수건 1장을 30년 동안 사용할 정도로 자린고비였다. 전화비가 아깝다며 외국에 유학 간 자녀가 국제전화를 걸어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면서 편지지에 빽빽하게 글을 썼다.

글로벌 경제전쟁시대에 단 하루도 쉴 수 없다며 노익장을 자랑하던 그는 90세이던 2006년 6월 일선에서 물러났다. 후임에는 전문 경영인 출신의 리즈춘(李志村·70) 사장을 임명했다.

그에게 자식은 골칫덩어리였다. 영국 런던대학 화학박사인 맏아들 왕원양(王文洋·55)은 80년 귀국한 뒤 가업을 이어받을 것으로 기대됐으나 결혼 문제로 의절했다. 아들은 홍런(宏仁) 그룹 회장으로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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