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美 도덕성 위기는 리더십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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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가혹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분명하고 옷을 전부 벗도록 모독을 당한 이라크 포로들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헤어나기 힘든 도덕적 함정 밑으로 빠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미국은 도덕적 책임이 매우 무거운 위치에 놓여 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은 자신이 스스로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이 됨으로써 세계질서를 주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초강대국이지만 정치력에 있어서는 문제가 많은 나라다.

*** 포로 모독 알려져 이미지 추락

우리는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잘해주기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세계질서의 안정은 국제적 리더십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간의 관계만 보면 미국은 동북아지역에서 중국.일본.러시아 3대 강국과 모두 동시에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과거에는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균형의 중간에 있든가 아니면 약한 편을 지원함으로써 3대 강국이 모두 미국과 긍정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미국은 과거에는 '힘의 균형'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균형보다 자신의 힘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무서운 군사력을 퍼부어도 우리가 실제로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면서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이라크에서 당면하고 있는 딜레마의 본질이다. 미국은 이미 베트남전에서 군사력만으로는 정치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라크에서 또다시 정치논리를 무시하고 군사논리만을 적용하는 정책적 오류를 범했다.

다행히 동북아시아는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다. 총성이 침묵하는 가운데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말 없는 경쟁만이 치열하다.

앞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초강대국인 미국이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세계 각국의 국민이 미국을 일방적이고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나라로 본다면 미국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없고 주도해 나갈 수도 없게 된다.

미국은 원래 이상주의적이고 남의 영토에 대해 야욕도 없는 선량한 국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외교정책의 문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은 전통적인 맹방국가에도 정책 문제에 대해 협의하지 않는 일방주의적 행동양식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레토릭(rhetoric)에 있어서도 거칠고 폭력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와 반감을 사고 있다.

예를 들면 '선제공격'이라는 개념은 상황진전에 따라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방부의 공식 전략개념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미국은 호전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국제정치는 힘의 정치라고 한다. '힘을 위한 투쟁'과 '힘에 의한 통치'를 뜻하는 표현들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타당한 개념들이다. 근본적으로 국제정치는 힘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선제 공격'은 호전적 인상 심어

그러나 힘이 국제정치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국제정치도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의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국제정치도 도덕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도덕성 없는 행동은 인간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신과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지금 미국은 심각한 도덕적 시련의 순간을 맞고 있다. 도덕성의 회복에 실패한다면 미국만 타격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상실한 힘은 세계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다. 하루속히 미국이 도덕성과 이상주의를 회복하기를 기원한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