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인프라를세우자>3.'영 컬처'의 産室 대학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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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대학로에 가면 누구나 길을 잃는다.한눈에 들어오는 좁은 공간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정체가 안보이는 이상한 곳이 바로 대학로다.주말 오후 발디딜 틈없이 들어선 젊은이들을 보면 여기가 바로 젊음의 거리인가 싶고,또 걸어서 5분 거리에 모여있는 40여개의 공연장에서 쉬지않고 쏟아내는 연극과 뮤지컬을 보노라면 연극의 거리인가하는 생각도 든다.
유명 건축가의 건물이 여기저기 이어져 있는 건축의 거리로 느껴질 때도 있다.하지만 행인을 유혹하는 현란한 카페건물을 보고있노라면 압구정동.홍대앞으로 대표되는 또 하나의 소비와 향락의거리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이런 다양한 문화 의 파편들이 멋대로 섞여있는 대학로에 서울시가 붙인 공식적 이름은 「문화의 거리」.하지만 누구도 대학로가 문화인프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오히려 문화는 없고 사건만 존재하는,우울한 떠돌이들 의 집합장소로 정의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하다.어느 곳이나 겪는과정을 대학로도 그대로 걷고 있다는 것이다.다시말해 화랑과 공연장이 밀집한 문화현장 대학로가 사람을 부르고 이에따라 자연스럽게 상업장소가 들어섰지만 이제는 상업이 문화의 영역을 점점 밀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이 턱없이 올려놓은 집값 때문에 정작 예술가들은 자리를 뻗을 만한 공간을 확보하기에도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연극공연을 위한 하루 대관료만도 40만원에서 많게는 1백만원을 넘는다.이렇게 되다보니 자연 순수 한 예술보다예술을 미끼로 한 장사가 판치는 장소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대학로의 소위 「잘 나가는」카페 마르파다.미술계 전화번호부에 적힌대로 「인공화랑」에전화를 걸면 뜻밖에도 『마르파입니다』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전화번호가 바뀐 것이 아니라 인공화랑이 재정적자 를 못견뎌 카페로 변신한 것이다.변신후에는 물론 돈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때 화랑 밀집지역으로까지 여겨지던 대학로에 화랑들이 거의 떠나버린 지금 또 소극장들이 다 떠나버리지 말란 법도 없다.
이런저런 불만속에도 대학로에 사람,특히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어떤 문화계 인사는 상징적인 건강함을 꼽는다.과거 서울문리대 자리였다는 이름을 팔아먹고 산다는 것이다.
압구정동이나 홍대앞 카페에서 술을 마실 때 아는 사람이 들어오면 고개를 돌리지만 대학로 카페에선 멀리 지나가는 사람까지 일부러 부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흥청망청 사람이 꼬이는 배경에는 대학로라는 이름값이 한몫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에 밀려 하나둘 문화가 대학로를 떠나게 되면 결국 사람이 모이지 않아 문화를 밀어냈던 상업마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대학로가 이런 회색빛 길을 걷기에는 너무 아까운 문화적 조건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 도시의 문화인프라로서 기능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조건이 두가지 있다.하나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접근이 쉬워야 한다는점이다.즉 한 도시의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을 때만 진정한 문화인프라가 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전철등 대 중교통과도 편리하게 연결된 교통요지에 위치한 대학로는 최상의 조건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또 한가지는 도시의 다른 공간,특히 도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 공간과의 연계가 돼야한다는 점이다.한장소에 극장 30~40개가 모여있다 고 해서 문화인프라가 되는것이 아니라 도시의 문화흐름 한가운데에 놓여있어야 한다.뒤편으로는 서울 성벽과 앞으로는 창덕궁.종묘등 고궁과 연결된 대학로야말로 더없이 좋은 문화인프라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학로의 진가(眞價)를 새롭게 인식하고 엉망으로 내팽개쳐져 있는 대학로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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