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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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선생이 독신자 모임의 게스트 스피커로 참석했다.
연한 오렌지색 체크무늬 셔츠 위에 두툼한 올리브 그린 등산용점퍼를 걸친 모습이었다.방금 한라산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다.
『멋있어요.』 말쑥한 신사복 차림속에서 조금은 어색해 하는 나선생에게 칭찬을 보냈다.안심시키기 위한 소리만은 아니었다.개성 없는 슈트의 무리 가운데 그의 차림새는 제주도 공기만큼이나신선했고 배색에도 신경쓴 흔적이 있어 더욱 신기했다.의외로 섬세한 남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을희의 코멘트에 그는 쑥스러운듯 한쪽 입가로 씩 웃었다.섹시했다. 우정탕이 고아지는 사이에 나선생의 스피치가 펼쳐졌다.
『말은 지배자의 말로 지배됩니다.그 좋은 보기로 영어를 들 수 있습니다.11세기의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공은 프랑스 공작이었고,영국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한 다음에도 줄곧 프랑스말만 썼습니다.상류층 사람들도 덩달아 프랑스말을 썼고 공용어도 프랑스말이었습니다.이후 프랑스말은 선주민의 언어인 앵글로색슨말과 약 3백년간에 걸쳐 섞여서 오늘날 영어의 기초가 됐습니다.한국말과 일본말은 프랑스말과 영국말의 관계보다 더욱 길고 더욱 진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고대 한국 인은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우수한 농경문화와 철기문화를 가지고 물밀듯 일본열도로 건너갔습니다….「고사기(古事記)」는 8세기초인 712년에 편찬됐다는 일본 역사서입니다.이 책의 첫 대목은 신대편(神代篇)이라는 신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는데,한 남신과 한 여신이 만나 「나라」를 낳아 보자는 논의를 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내 몸엔 남는 부분이 한 군데 있소」라고 남자신이 말하자 여자신은 「내 몸엔 한 군데 모자라는 부분이 있소」라고 대답합니다.「그럼 내 남는 부분을 당신의 그 모자라는 부분에 넣어 아이를 낳아 보는 것이 어떠오」라는 남자신의 제의를 여자신은 선뜻받아들입니다.그래서 둘은 「마구하히(まぐはひ)」를 하여 차례로일본의 여덟 섬을 낳아 갔다는 신화입니다.마구하히-.「고사 기」는 이것을 한자로 「마구파비(麻具波比)」라 표기하고 있습니다.「마구하히」는 「성교(性交)」라는 뜻의 일본 고대어입니다만 실은 우리의 옛말 「마게바비」가 변음된 것입니다.「마게」,즉 남성 성기를 「바비」,즉 비빈다는 뜻이지요….』 우정탕 끓는 소리가 담담한 나선생의 목소리 사이에 일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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