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블랑카’도 건강보험 가입하고 싶어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호 34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 가끔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국을 찾는 사례가 최근 급증하고 있는 현상도 그런 일이다. 주로 미국·캐나다·일본 등 선진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의료기관을 찾아온다니 우리 의료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방증하는 듯하여 반갑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무리 외국에 오래 살았어도 한국에 들어와 6만원가량의 돈만 내면 ‘즉시’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혜택만 누리고 곧바로 떠나가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의료비는 선진국에 비해 훨씬 싸다. 건강보험의 혜택까지 받으면 선진국에서 자기 돈 내고 치료받는 것에 비해 10분의 1 미만의 비용이 든다. 중증 질환의 경우 수천만원까지도 아낄 수 있으니 항공료와 체재비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건강보험에 가입한 재외 국민은 2003년 9600여 명에서 지난해 1만9600여 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같은 기간 진료 건수는 3배 이상 늘었으며, 진료비는 37억원에서 140억원으로 4배 가까이 늘었다. 재외 국민 중 건보 혜택을 많이 받은 상위 100명의 경우 평균 급여비용이 2000만원을 넘어섰다.

전체 건보 재정의 규모를 생각할 때 140억원은 작은 돈일 수도 있다. 외국에 사는 우리 동포의 질병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야멸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 제도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불만과 형평의 원칙 등을 생각할 때 이런 무임승차를 제한하는 법령 정비가 시급하다.

사실 이런 현상은 올 들어 부쩍 심해진 것이다. 지난해까지 재외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하려면 3개월치 보험료를 납부하고 국내에 3개월 이상 체류해야만 가능했는데, 교포들이 불만을 제기하자 복지부가 기준을 완화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하지 못하고 무작정 ‘동포애’를 발휘했다가 문제가 불거진 셈이다. 지난 7일 복지부 국감에서 전재희 장관은 “내년 1월부터 다시 3개월 체류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에 한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한국 국적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국에 살면서 꼬박꼬박 세금과 건강보험료를 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이 정도의 차별은 합당한 수준이라 본다.

정부가 오류를 바로잡겠다고 했으니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건강보험 혜택과 관련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해묵은 숙제가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불법 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게 건강보험 가입 자격을 줄 것인지 여부다. 현재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의 문호가 열려 있다. 그러나 최소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불법 체류자는 건강보험 가입 자격이 없다.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몇몇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공제회 성격의 사설 건강보험과 극소수 무료 진료소뿐이다. 질병과 부상 앞에 거의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도 마찬가지다.

불법 체류자에게 무슨 사회복지 혜택을 주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도 산재보험 가입 자격을 주고 있다는 점, 불법 체류이기는 하나 그들이 이미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불법 체류자에게도 건강보험 가입 자격을 주는 선진국이 적지 않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인도적 차원에서 건강보험 가입 자격을 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일이다. 내국인과 똑같은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어렵다면 본인부담 비율이나 상한선을 조정하여 기본적인 의료 보장만이라도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200만 명을 넘었고, 국내의 외국인은 100만 명을 넘었다. 한쪽은 피를 나눈 동포이고, 다른 한쪽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하는 또 다른 의미의 동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