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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눈>폴크스바겐식 해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글렌게리 글렌 로스』란 영화가 있다.제임스 폴리 감독의 92년작으로 3년전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이 영화는 「무실적=실직」이란 세일즈맨들의 비정한 경쟁세계를 그리고 있다.실패만 거듭하는 레빈역의 잭 레먼이 살아남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휘영청 둥근달만큼이나 몸과 마음이 풍성해야 할 추석연휴기간을고민과 한숨으로 지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바로 레빈처럼 실직,요즘 유행하는 말로 「명퇴」에 내몰리고 있는 중.장년층 샐러리맨들이다.
당당하게 명예퇴직을 받아들이기엔 그동안 벌어놓은 것이 없다.
다른 일을 시작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고 능력도 시원찮다.또 자식들은 한창 돈이 들어가는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이니 답답한 노릇이다.「자식 대학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낼 때까 지만이라도 회사에 붙어있을 수 있다면…」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꿈이 지금처럼 절실했던 적이 없다.안팎의 따가운 눈총에 느느니 한숨이요,쌓이느니 수심(愁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 명예퇴직 돌풍.「명예」라는 이름으로 치장은 했지만 사실상 대량해고라는 A급태풍의 서곡이다.따지고 보면 이 A급태풍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전세계적인 산업구조재편의 물결 속에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보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과 한두달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것으로 돼 있었다.때문에 준비도 안했다.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명예퇴직이란 말이 유행어가 됐다.
70~80년대 고도성장의 주역이었지만 이제 총체적 경제난의 주범으로 몰려 음.양으로 퇴직을 강요당하는 40~50대.그들을위한 대책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나오고 있으나 당사자들에겐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물론 고용과 실업이라는 자본주의 지난(至難)의 과제에 만병통치약은 없다.그러나 우리 보다 앞서 이 문제로 매 맞은 외국의 경험이 타산지석(他山之石)은 될 수있을 것이다.
유럽 최대의 자동차메이커인 독일 폴크스바겐사의 경우를 보자.
감원태풍이 한창이던 지난 93년 이 회사는 노조측과 의미있는 임금협상을 벌였다.극동아시아(보통은 일본이지만 이제는 한국도 포함되는 개념)로부터의 시장잠식을 이겨내기 위해 다량감원이 불가피했던 회사는 이를 통보할 예정이었다.그러나 노조는 감원 대신 근무시간의 단축을 제시했다.결국 노사는 94년부터 세계 최초로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임금을 10% 삭감하는데 합의했다. 『회사경영이 어려운데 근무시간을 줄인다?』-우리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얘기다.그러나 「시간=돈」이란 개념이 철저한 구미에서 이는 상식이다.가령 종업원 1백명인 기업에서 모두가 하루 8시간 근무시간 외에 1시간씩 일을 더 하면12.5명의 감원요인이 생긴다는 것이다.거꾸로 1시간씩 덜 일하면 12.5명의 추가고용효과가 생기는 것이다.이 때문에 독일에서 휴일에 출근해 일하면 남의 고용기회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처벌까지 받는다.
아직도 약 3만명의 잉여인력을 갖고 있는 폴크스바겐사는 최근잔업수당이나 토요근무비를 퇴직금으로 돌려 조기퇴직을 유도하고 있으며 정년(60세)이 가까운 노동자들에게 주 20시간 파트타임근무제를 허용하는 등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다량 해고를 하는 타회사들과는 다른 노사관계를 보여주고 있다.사측의 이같은 배려로 이 회사는 생산성이 향상되고 수주도 늘어나 생산이 판매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현재의 경영난 타개를 위해 연구개발 등 적극적 대책마련은 등한히하면서 손쉬운 감원만을 생각하는 기업이 있다면 폴크스바겐사의 예에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팀장) 유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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