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南北 군사회담에 초조해 말라

중앙일보

입력

5일 평양에서 열린 제14차 남북 장관급회담 첫 전체회의에서 우리 측 정세현 수석대표는 "지난 2월 제13차 장관급회담에서 합의한 군사당국자 회담을 5월 중 개최할 것"을 제의했고, 북측 권호웅 수석대표는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면 군사당국 간 회담을 열 수 있다"고 하면서 남측 제의를 일축했다.

이번 장관급회담을 통해서도 남측과는 어떤 실질적인 군사회담도 하지 않겠다는 북한 군사당국의 입장에 전혀 변함이 없거나, 아니면 북측이 우리의 군사회담 제의를 임의로 농락하고 있음이 거듭 확인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북한 측은 우리 측의 군사회담 제의를 역이용하여 우리 사회의 국론 분열을 조장하고 한.미 군사관계를 이완시키려는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지를 남북 군사회담 개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우리 측의 5월 중 남북 군사회담 제의는 꽃게잡이 철인 5~6월 서해상에서의 군사충돌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제의라 할 수 있다. 반면 북측의 반응은 우리 군사태세의 근간을 이루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지 등 중대한 안보위협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즉 북측은 현 시점에서 한반도 군사문제는 북한과 미국 사이의 문제지, 남북 군사당국 간에 협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기존 입장을 다시 내세운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북측이 아직도 그런 입장이라면, 앞으로 우리의 대북 군사회담 제의는 어떤 성격이어야 할까. 첫째, 우리 측은 우선 남북 군사회담 개최 자체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의 가시적 성과나 상징적 효과를 과시하기 위해 남북 군사회담 개최 자체에 매달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신 우리 측의 대북 군사회담 제의는 군사 긴장완화, 군사 신뢰조성 등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확고한 입장과 원칙을 계속 천명하는 한편 북한 측의 호응을 강력히 촉구하는 대북 의지 표명 또는 의사전달 수단으로 삼는 것이 보다 현실적 접근일 것이다.

둘째, 남북 군사회담의 성격에 대한 북한 측의 기본인식과 접근방법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북측은 1994년 핵 문제를 계기로 미국과의 양자 대화가 가능해진 이후 남측과의 군사회담에는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고 미.북 군사대화만 고집해왔다. 만일 남측과의 군사대화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거나, 역이용하기 위한 임시 방편일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은 2001년 9월 제주도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린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뿐만 아니라 그후 여러 차례에 걸친 남북 군사 실무접촉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북측은 우리 측의 가장 초보적인 군사 신뢰구축에 관한 협의조차 거부했고, 오로지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 관련 문제에 대해서만 협의에 응하는 자세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대북 군사회담 제의는 북측에 오히려 역이용당할 수 있는 구실만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남북 군사회담이 북측에 의해 한.미 군사관계 파괴 수단으로 역이용당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해야 할 것이다. 북한 측은 이번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우리 측이 강력히 요구한 군사회담의 5월 개최 제의를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지와 연계시킴으로써 사실상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남북 경협활성화 문제를 한.미 군사관계와 결부시키려는 저의를 드러냈다. 앞으로 이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남북 군사회담은 철저히 경계돼야 할 것이다.

특히 올해 제17대 국회의 출범과 아울러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우에서 좌로' 흐를 가능성이 크고,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가 동시에 출렁일 수 있다. 북한이 이런 남측 상황을 놓치겠는가. 이 상황에서 남북 군사회담보다 더 시급한 것은 한.미 군사 신뢰관계의 회복일 것이다.
박용옥 한림대 교수.전 국방부 차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