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서울 컨센서스’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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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금융 불안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요즘으로선 한가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은 지금이야말로 위기 이후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미국의 오바마 후보가 지난 여름 자카리아의 『미국 이후의 세계 (Post-American World)』라는 책을 옆에 끼고 다닌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위기 이후의 질서’에 대한 논의에 실마리가 될 만한 발언을 내놓았다. 우선 금융 불안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한·중·일 재무장관 회의를 제안했고, 또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800억 달러 규모의 공동펀드를 조성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직 중국과 일본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 제안이 점차 강화될 지역적 움직임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는 온 세상이 아는 비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동아시아 협력의 논의에서 이니셔티브를 발휘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 통합의 긴 역사에서 독일·프랑스 간의 경쟁을 통제하며 페이스를 관리한 것은 네덜란드·이탈리아 같은 중간 국가들이 아니었던가. 요즘의 불안한 현실 속에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아주 낙관적인 그림을 그려보자면 향후 동아시아 협력의 정치에서 우리가 페이스 메이커가 될 가능성이 아주 작은 것만은 아니다. 금융·무역·문화·기술 협력의 방향을 우리가 먼저 제시하고 논의의 틀을 제공하는 ‘서울 컨센서스’가 전혀 허황된 청사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서울 컨센서스’는 20~30년을 내다보는 장기 프로젝트임에 틀림없는데, 필자는 이 기획은 우리 안의 현실을 돌아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 이 대통령 발언의 속내와 구체적 그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구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장애물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당파성이 지배하게 된 정책 결정’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에 새롭게 떠오르는 ‘팽창주의와 평화주의의 대립’이다.

먼저 당파성의 문제. 최근 인터넷 실명제 강화 논란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논의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안을 당파성의 안경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당파적 경쟁이 민주주의의 동력이고 활력 있는 민주주의의 조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20년의 민주화를 거치며 당파성은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정치 사회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대북정책, 미래를 좌우할 교육정책에서 드러나듯이 초당파적 접근이나 중용적 사고가 숨 쉴 공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파성이 지배하는 정치는 역동적이긴 하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게 된다. 모든 정책이 당파적 접근으로 좌우될 때 정책의 일관성, 장기적·전략적 접근은 불가능하다. 치밀하면서도 장기적인 관점이 요구되는 지역 협력 프로젝트에서 당파성이라는 블랙홀은 거대한 장애물이 된다.

‘서울 컨센서스’로 가는 길의 또 다른 장애물은 우리 안에서 점차 뚜렷해지는 ‘팽창주의와 평화주의의 대립’이다. 세계 10위 규모의 경제로 발돋움하면서 과거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팽창적 민족주의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불과 10년 전 박세리·박찬호의 활약에서 위안을 얻던 우리는 어느새인가 아시아에서 우뚝 솟은 한류 문화의 영향력에 환호하고 있다. 엄청난 숫자의 선교사가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고, 정부는 10만 명의 인터넷 전도사 파견을 검토 중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온라인상에서 독도 문제, 교과서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일본 네티즌과의 사이버 대리전쟁이 점차 잦아지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이에 맞서는 평화주의의 흐름도 뚜렷해지고 있다. 햇볕정책의 성과, 국제적 연대, ‘민주화 이후 세대’의 등장을 기반으로 평화주의 역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최근 이라크 파병이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뜨거운 대립은 이러한 갈등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두 가지 장애물 가운데 시급한 것은 당파성 문제다. 초당파적 사고를 넓혀 갈 때에 비로소 팽창주의와 평화주의의 대립도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정치권보다는 이를 감독·견제하는 언론, 지식인, 사이버 논객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이 당파성에 기대기보다는 독자적인 중용의 공간을 넓혀갈 때 우리는 안과 밖에서 컨센서스의 기반을 닦을 수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