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와이너리가 명주를 만들어 내기까지는 수십 년부터 수백 년까지도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는 대를 이어 가문의 명예와 양조가로서의 자부심을 지켜온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깃들여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동그마니 남겨진 양조가의 미망인과 두 딸. 하지만 그녀들은 힘을 합쳐 와이너리를 지켰고 마침내 섬세한 와인 ‘클로 데 카푸친’을 만들어 낸다.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세 시대 수도승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등에 메고 있는 묵직한 나무통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포도 수확 때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수도승 뒤로 ‘클로 데 카푸친(Clos des Capucins)’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래에는 알자스 마을의 7개 대표 포도 품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리슬링(Riesling)’과 그랑 크뤼로 알려진 ‘슐로스베르그(Schlossberg·알자스 지역에서 최초로 그랑 크뤼 포도밭으로 인정받은 곳으로 모래와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의 400m 높이 언덕)’ 포도밭 이름을 써 놓음으로써 와인의 품질을 알려주고 있다.
수도원의 포도밭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정부에 귀속되었다 알자스 콜마에 살던 귀족을 거쳐 1898년에 팔러 가문 두 형제의 소유가 됐다. 본래 팔러 가문은 가죽 가공업을 하던 집안이었지만 포도밭을 구입한 뒤 와인도 생산하는 가문으로 거듭났고 1904년 이후부터는 와인에만 전념하게 된다. 포도밭은 가문의 대를 이어 상속되었고 1930년대 말 조카인 테오 팔러(Theo Faller)가 참여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포도밭은 확장되고 오래된 건물은 보수되었으며 가문은 와인뿐 아니라 알자스의 정치, 스포츠, 와인 농업 분야에까지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됐다. 이러한 열정은 도멘 바인바흐를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됐고 그 명성만큼 품질 향상에도 노력했다. 79년 중심축이었던 테오의 죽음으로 와이너리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 역경을 딛고 더욱 유명한 와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테오는 죽기 전 두 명의 아름다운 딸과 미망인을 남겼는데 이들 세 여인이 가문의 대를 이어 와이너리를 운영하게 되면서 이뤄낸 성과다. 어머니이면서 디렉터 역할을 하는 콜레트,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는 장녀 카트린, 와인 양조를 책임지고 있는 차녀 로랑스가 바로 그 주인공.
이들 세 미녀의 와인에 붙은 명성은 단지 ‘여인들이 만든 와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테오의 열정적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가족이 그녀들이었고, 이 때문에 이들이 뭉쳐 만든 와인에는 남다른 철학이 있다. 와인 자체를 사랑하며, 자연환경을 변화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을 잘 살려 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 결과 와인은 과일의 순수함과 섬세함을 오랫동안 입 안에서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지금 ‘도멘 바인바흐’아랫단에서 이 세 여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이 와인을 알게 된 초창기에는 레이블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도멘을 방문했을 때 여인들을 만나 가문의 이야기를 듣고는 모든 것을 재정리하게 됐다. 한 병의 와인 레이블 속에는 포도밭과 가족의 역사가 모두 스며 있다. 필자는 가끔 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카트린과 함께 거닐었던 슐로스베르그 언덕의 허물어진 고성과 도멘의 원천인 작은 시내를 기억해 낸다. 그날 그곳에는 잔잔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바로 오늘 가을 아침처럼….
김혁 hkim@podopla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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