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수도원 옆 포도밭의 세 미녀, 와인을 만들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호 14면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세 시대 수도승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등에 메고 있는 묵직한 나무통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포도 수확 때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수도승 뒤로 ‘클로 데 카푸친(Clos des Capucins)’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래에는 알자스 마을의 7개 대표 포도 품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리슬링(Riesling)’과 그랑 크뤼로 알려진 ‘슐로스베르그(Schlossberg·알자스 지역에서 최초로 그랑 크뤼 포도밭으로 인정받은 곳으로 모래와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의 400m 높이 언덕)’ 포도밭 이름을 써 놓음으로써 와인의 품질을 알려주고 있다.

와인 레이블 이야기 <11>

이 레이블의 주인공은 카이저베르그 마을에 위치한 도멘 바인바흐(Domaine Weinbach). 그림이 암시하듯 이 포도원은 수도원에서 관할하던 곳으로 890년대부터 포도밭이 존재했고, 기록에 따르면 1612년 이후부터 수도승들에 의해 이미 ‘도멘 바인바흐’로 불렸다고 한다. 포도밭 옆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Bach·시내)에서 유래해 ‘Weinbach·와인이 흐르는 시내’가 있는 도멘으로 알려졌고 지금도 이 시내는 같은 곳에서 흐르고 있다.

수도원의 포도밭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정부에 귀속되었다 알자스 콜마에 살던 귀족을 거쳐 1898년에 팔러 가문 두 형제의 소유가 됐다. 본래 팔러 가문은 가죽 가공업을 하던 집안이었지만 포도밭을 구입한 뒤 와인도 생산하는 가문으로 거듭났고 1904년 이후부터는 와인에만 전념하게 된다. 포도밭은 가문의 대를 이어 상속되었고 1930년대 말 조카인 테오 팔러(Theo Faller)가 참여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포도밭은 확장되고 오래된 건물은 보수되었으며 가문은 와인뿐 아니라 알자스의 정치, 스포츠, 와인 농업 분야에까지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됐다. 이러한 열정은 도멘 바인바흐를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됐고 그 명성만큼 품질 향상에도 노력했다. 79년 중심축이었던 테오의 죽음으로 와이너리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 역경을 딛고 더욱 유명한 와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테오는 죽기 전 두 명의 아름다운 딸과 미망인을 남겼는데 이들 세 여인이 가문의 대를 이어 와이너리를 운영하게 되면서 이뤄낸 성과다. 어머니이면서 디렉터 역할을 하는 콜레트,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는 장녀 카트린, 와인 양조를 책임지고 있는 차녀 로랑스가 바로 그 주인공.

이들 세 미녀의 와인에 붙은 명성은 단지 ‘여인들이 만든 와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테오의 열정적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가족이 그녀들이었고, 이 때문에 이들이 뭉쳐 만든 와인에는 남다른 철학이 있다. 와인 자체를 사랑하며, 자연환경을 변화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을 잘 살려 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 결과 와인은 과일의 순수함과 섬세함을 오랫동안 입 안에서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지금 ‘도멘 바인바흐’아랫단에서 이 세 여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이 와인을 알게 된 초창기에는 레이블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도멘을 방문했을 때 여인들을 만나 가문의 이야기를 듣고는 모든 것을 재정리하게 됐다. 한 병의 와인 레이블 속에는 포도밭과 가족의 역사가 모두 스며 있다. 필자는 가끔 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카트린과 함께 거닐었던 슐로스베르그 언덕의 허물어진 고성과 도멘의 원천인 작은 시내를 기억해 낸다. 그날 그곳에는 잔잔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바로 오늘 가을 아침처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