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7. 앵정 소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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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정 소학교 스모부에 들어간 나는 스모 선수가 되려고 했다가 어머니께 크게 야단을 맞았다.

 한국 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인 학교로 전학한 나는 일본 학생 틈에서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앵정 소학교 터는 해방 후 영희 국민학교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덕수고등학교가 됐다.

나는 일본 애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공부는 물론 운동도 열심히 했다. 4학년 때는 한 학년에 2명씩, 12명이 달리는 전교 릴레이 대표로 뽑혔고, 5학년 때는 학년당 4명이 뛰는 학년 릴레이에 나섰다. 학교에 검도와 스모부가 있었는데 나는 스모부에 들어갔다. 그때 같이 스모부에 있었던 일본인 동창이 “발걸이 같은 이상한 기술을 쓰는 바람에 아무도 (운용이를) 이기지 못했다”라고 회상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정말 스모를 좋아했다. 스모 대회가 있으면 꼭 찾아서 봤다. 한번은 스모 선수를 골목에서 기다리다가 붙잡고 “나도 스모선수가 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너무 작아서 안 되고 일단 도쿄에서 심판을 하다가 큰 다음에 스모꾼이 되라”고 하기에 어머니께 말했다가 “일본 가서 스모 하라고 너를 키운 줄 아느냐”라며 혼이 났다.

한 번은 운동회 때 어머니가 하얀 한복을 입고 오셨다. 일본인들 틈에 끼어있는 하얀 한복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띄었다. 더구나 동네 아저씨들을 ‘응원단’으로 데리고 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시는데 부끄러워서 혼났다. 아마 어머니는 아들 기 죽지 말라고 일부러 그러셨던 것 같다.

한국인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니 자연히 표적이 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모아두신, 진귀한 서적이 많았다. 대부분 일본어였고 루팡 전집 같은 책들이 많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 등교해서 보니 지금까지 빌려준 책들이 내 책상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마침 아침조례를 하려고 들어오신 담임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일본인 반장이 입을 열었다.

“김 군은 항상 학교에서 이런 탐정 소설만 읽습니다. 모두에게 빌려준다고 하면서 공부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고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 혼날 줄 알고 떨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의외로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라”라고 하시며 넘어갔다.

너무 분해서 동네에서 발차기와 주먹치는 법을 배웠다. 가끔 나에게 못된 짓을 하거나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일본 학생과 길거리에서 싸우기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할 때마다 어른들은 “독립하면 일본인은 모두 도망갈 테니 그때까지 참아라”라고 격려해 주셨다.

중학교 입학 때가 됐다. 당시 공립중학은 일본인이 다니는 경성·용산·성동, 한국인이 다니는 경기·경복,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반반씩 다니는 신생 욱구중학(현 경동고)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경기에 보내려고 하셨다. 그런데 앵정 소학교에서 “일본학교에서는 학생을 한국학교로 보내지 않는다”라고 해서 욱구중학으로 가게 됐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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