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영화 "데드맨 워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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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구성은 절제됐다.스타일은 담백하다.카메라는 움직임을 최대한 절약했고 감독은 해야할 말만 간결하게 던졌다.
그럼에도 『데드맨 워킹』은 감정의 양극단을 충동질한다.허투루고함치지도 않고 쉽게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헬렌수녀와 사형수 매튜의 이야기는 아름다움과 정겨움,분노와 고통스러움 따위의상반된 느낌을 동시에,더러는 연속적으로,혹은 따로따로 자아낸다.그래서 영화는 조용히 어지럽다.이를테면 매튜가 자신의 무고함을 떨리는 입술로 주장할 때,그 입술로 막내동생의 소심함을 놀려줄 때,짓궂은 눈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의 범행 장면이 인서트 컷으로 삽입될 때,혹은 혼란 한 마음을 다독거리며 헬렌이그의 말에 귀기울일 때,그녀가 자신의 유년기 체험을 회상할 때영화가 발산하는 감정은 극단적이다.
관객은 뒤엉킨 감정의 복판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이건 의도된 혼란이다.감독은 일부러 우리를 이 혼란의 한가운데로 떠민 것이다.그 안에서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한다.
어느 쪽이건 견딜 수 없었지만 현실이란 이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동거상태를 이성적인 판단으로 가르는 것의 연속이다. 팀 로빈스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두 측면,즉 선함과 사악함이 교차하는 인생에 대해 조용히 사색한다.그리고 묻는다.인간은어떻게 해야 인간이 되는가.우선 매튜의 행동이 그 답을 대신한다.악을 저지름으로써 매튜는 죄인이 됐다.
그러나 더 큰 죄는 그가 자신이 지은 악행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파렴치하게 부인한다는데 있다.이건 인간 이전의 모습이다.헬렌은 그런 모습을 용서하고 사랑하려 했다.그녀는 판단하지 않았다.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건 「범죄=처벌」의 등식을 버리고 「범죄=본성」이라는 근원적인 물음,사랑의 마음을 택한 태도다.바로 이 태도로 인해 매튜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다.마침내 자신의 추한 몰골을 온존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헬렌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는 사랑을 베풀어서가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해 그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존엄해진다.이 영화가 조건없는 사랑의 고귀함을 마구 소비해대는 단순한 종교영화와 다른 점이 이것이다. 그러나 계몽영화의 허방에 미끄러진 점도 있다.사실 헬렌은 처음부터 온화했다.속도위반이나 방황은 암시적이고 짧지만 그녀가누리는 평정과 화해의 자세는 노골적이고 길다.매튜에게 사형이 확정된 이후에 감동은 아예 표현주의(!)적으로 모 든 주장을 확대하고 강조한다.『데드맨 워킹』이 신실한 진정성에도 불구하고더 담백한 미학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는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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