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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참 향기로운 꽃이네요.』 을희는 해당화 가까이 다가가 향기를 맡으려 했다.
『조심해요! 가시가 많아요.』 켄트백작이 을희의 팔을 잡았다.엉겁결에 잡은 그의 손이 을희의 젖가슴에 닿았다.온몸에 전류(電流)가 흐르는 것같았다.
그도 놀란듯이 을희의 몸에서 얼른 손을 뗐다.그 재빠른 동작이 을희의 젖가슴에 그의 손이 닿았음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을희는 스스로 짐작할 수 있었다.침묵 속을 걸어오는 소리.그 운명적인 사랑의 소리를….
무서운 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을희는 짐짓 밝은 말투로 물었다. 『부모님께서는 왜 「얼」이라고 이름지으셨어요?』 손수건을 꺼내 모래 언덕에 깔고 을희를 앉히며 얼 켄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랍니다.그 분이 왜 「얼」이라 이름지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우리 옛말로 「얼」은 「샘」의 뜻이지요.작은 옹달샘은 아니고 호수처럼 큰 샘을 가리켰어요.그리고 그 얼을 지키는 사람을 「얼치」라 그랬는데,「치」는 「신」「왕」「귀인」의 뜻이니까 「얼치」는 「샘의 신」「샘의왕」을 가리킨 말이었 어요.그런데 우습지요? 「을희(乙姬)」라는 제 이름은 할아버님께서 지어주셨는데,「샘」이란 뜻의 「얼」에서 따신 거라나봐요.아주 옛날 「얼」은 「얼이」라 불렸답니다.「을이」라고도 했구요.그래서 그 소리를 따서 「을희」라 하셨대요.샘처 럼 맑고 유익한 인간이 되라고 지으신 거라는데….』을희는 요설(饒舌)이 되어가고 있었다.마음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서일까.
『두 샘이 아우러지면 강이 되어 큰 바다로 흘러가겠군요.』 얼 켄트는 농담처럼 말하며 자기 왼쪽 약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고 을희의 왼쪽 가운뎃손가락에 끼었다.헐렁했다.그는 다시 집게손가락에 옮겨 끼었다.아주 작은 하늘색 돌을 박은 투박한 백금반지였다.
『무슨 반지예요?』 영문을 알 수 없어 캐묻듯 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졸업 반집니다.이 돌은 터키석인데 행운의 상징이랍니다.복학 기념으로 드리고 싶어요.』 『저한테요?』을희는 반지를 자기 손에서 빼고 얼 켄트에게 되돌렸다.
『귀한 졸업 반지를 받을 순 없어요.』 얼 켄트는 을희의 손을 꼭 쥐고 다시 반지를 끼고나서 지령(指令)하듯이 말했다.
『이걸 끼고 다니며 늘 맹세해요.대학을 꼭 졸업하겠다고….』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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