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代 이 사람을 주목하라] 9. 민노당 천영세 당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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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당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출마한 창원에서 보냈다. 서울의 중앙당에는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중앙당에 믿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천영세(61) 당선자다. 그는 선대위원장직을 맡아 權대표가 없는 중앙당의 선거전을 진두지휘했다. 당 관계자들은 "그가 차분하고 조용하게 당을 잘 챙겼기 때문에 의석 10석 획득이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千당선자는 노동운동의 '맏형'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노동만이 아니다. 화려한 이력이 그걸 말해준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공동의장,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민주노총 지도의원, 통일연대 공동상임대표 등 그가 거친 굵직한 자리만도 여러 개다. 그래서 그는 원내에서 활동 폭이 가장 큰 민노당 의원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1963년 고교를 졸업한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농사를 지었다. 그때만 해도 "농민들이 게으르고, 농사 지식까지 부족해 못산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농사를 지을수록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농민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했고, 농법 등에 대한 지식도 많았지만 못살았다. 그건 농민의 탓이 아니라 사회적인 모순 때문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그는 사회에 대한 체계적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고교 졸업 3년 만에 고려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과 노동문제연구소 연구활동 등을 통해 노동.농민 문제를 탐구했다. 대학 졸업 후인 73년 그는 한국노총 화학노조의 기획실장으로 노동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후 30여년간 노동운동을 하면서 통일운동 등 활동영역을 확대해 갔다.

千당선자는 97년 권영길씨와 함께 '국민승리 21'을 결성했다. 그리고 당시 대선에 출마한 權씨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두 사람이 민노당의 기초를 닦았다는 얘기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千당선자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반드시 철폐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환경노동위나 통일외교통상위에서 활동하길 원한다고 했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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