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패닉 진정…실물 위기는 지금부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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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06면

위기는 끝난 것인가
미국 정부가 돈을 살포하다시피 공적자금을 쏟아 붓는 덕분에 금융시장의 공포 심리는 진정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 정부가 세금을 동원해 금융회사가 안고 있는 부실 모기지 자산을 매입해주면 금융회사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월스트리트 금융회사가 무너져 글로벌 시장 전체가 패닉에 휩싸이는 사태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한결 줄어든 셈이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다.

美 공적자금 투입 이후

집값 추락→관련 대출 부실화→금융회사 손실 누적→파산 위험→패닉으로 이어진 연쇄고리 가운데 금융회사 파산 위험을 일단 낮춰놓은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 정부의 조치가 사태의 시발점인 집값 하락을 진정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공적자금이 곧바로 주택 구입 자금으로 쓰이는 게 아니어서다.

금융회사들이 부실 자산을 미 정부에 팔아 치운 뒤 곧바로 주택자금 대출에 나설 가능성도 크지 않다. 대출 신청자를 엄밀하게 평가해 돈을 꿔주므로 주택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은 버블 붕괴 이전처럼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 정부가 또 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는 한 집값 추락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美 실물경제의 향방은
금융위기는 실물경제로 전염돼 극심한 침체를 불러오곤 한다. 1700년에서 2001년까지 발생한 40차례 위기 가운데 단 한 차례만 빼고 모두 아주 심한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닷컴 거품 때만이 예외였다. 그땐 금융회사의 파산이 줄줄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경기 침체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번 거품 붕괴와 위기의 고통이 더 커지고 있고 이후 본격화할 침체도 깊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미 정부의 대응에 따라 경기 침체의 깊이와 기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29년 대공황 직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이듬해 취임해 이른바 ‘위기 대응 100일 계획’을 추진한 뒤에야 정부 대응이 본격화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 정부가 손놓고 있었던 셈이다. 그 결과 침체의 고통이 전무후무할 정도로 컸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이번 침체가 대공황 수준은 아니지만 80~81년 더블딥(이중 침체)처럼 18개월 이상 진행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 경제가 침체에서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활력을 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위기를 겪은 나라의 경제는 양극화가 심화돼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도 위기라는데
글로벌 금융시장은 패닉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돈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른바 패닉 직후 위험 기피현상이다. 이런 때 글로벌 자본 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 결과 취약한 기업이나 나라는 뜻하지 않게 유탄을 맞을 수 있다. 1순위로 꼽히는 나라가 러시아다.

이미 외국 자본이 대거 이탈했다. 러시아 정부가 긴급 자금을 투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짙은 불안감이 가시지 않고 있다. 중국도 사정권 안에 들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미 경기 침체로 인한 수출 부진으로 기업 실적이 악화하면 금융권 부실자산이 급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은행권 부실자산이 40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추정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중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한 덕분에 부실자산은 표면화하지 않았다. 이 밖에 브라질과 인도·베트남도 위기 후보군에 올라 있다.

한편 영국에선 최대 주택금융회사인 HBOS가 위기를 맞아 인수합병(M&A)됐다. 이 나라에서도 집값이 급락해 미국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유럽 기업들의 취약한 재무구조다. 유럽 기업들은 유동성 풍년으로 금리가 낮아지자 주식보다는 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해 썼다.

올 6월 말 현재 유럽 기업들이 짊어지고 있는 빚이 무려 7조6000억 달러에 달한다. 유로존 GDP의 57%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미 일부 기업은 급등하는 금리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주 보도했다. 조만간 취약한 기업이 파산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외환·주식시장의 전망은
지난주 초 글로벌 금융시장이 패닉에 휩싸였을 때 돈이 안전한 미 재무부 채권으로 대거 몰리는 바람에 달러 가치가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공적자금 투입이 논의되면서 재무부 채권 값이 떨어지자 달러 가치도 내림세로 돌아섰다. 단기적으로 달러 가치는 글로벌 유동성의 움직임에 따라 급등락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공적자금 투입 효과 때문에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번 조치로 미 정부의 재정적자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 발표 소식에 지난주 글로벌 증시는 반등에 성공했다. 패닉 진정 효과다. 33년 루스벨트가 ‘100일 계획’을 발표하고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면서 신뢰성을 회복하자 단기적으로 주가가 급등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해 상승률이 50%를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기업 실적 등 펀더멘털이 약화되자 주가는 상승 에너지를 잃고 다시 조정받았다. 97년 12월 외환위기에 직면한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해 구제금융을 받기로 한 직후에도 단기적으로 주가 급등이 발생했다. 하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미 정부 추가 대책 내놓을까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책은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연체자에 대한 집단 워크아웃(채무구조조정)이다. 개별 금융회사가 생색내듯이 선별적으로 워크아웃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공적자금 투입 직후에는 미 정부가 강력히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또 미 민주당이 주장하는 2차 경기 부양책도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표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실해진 신용카드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 공적자금도 마련될 전망이다. 심지어 요즘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 자동차 3사도 정부의 보증을 통한 저금리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은 기축통화인 그린백(달러)을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찍어낼 수 있다. 하지만 미 정부와 중앙은행은 통화 남발이 야기할 후유증을 염려해 일단 채권 발행으로 조달한 돈을 공적자금으로 쓸 예정이다. 하지만 미국이 채권을 대량 발행해 세계 달러 자금을 빨아들이면 일반 기업들이 조달해 쓸 수 있는 돈이 귀해져 자금난이 심해질 수도 있다.

또 다른 복병은 없나
유동성 풍년 시절 사모펀드 등이 대거 빌린 자금을 동원해 기업 사냥을 벌였다. 메이저 금융회사들은 사모펀드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준 상태다. 글로벌 침체가 현실화하면 사모펀드들이 사들인 기업의 현금 흐름이 나빠져 부실 자산으로 둔갑할 수 있다. 이번 사태에 살아남은 메이저 금융회사 가운데 일부는 사모펀드에 꿔준 돈을 받지 못해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당분간 자금은 금융권 내에서 맴돌 가능성이 크다. 안전자산 선호 현상 때문에 기업 등 실물 부문에 돈을 대주는 것을 꺼리는 금융회사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권을 맴돌던 자금은 단기 수익을 노려 틈만 있으면 특정 종목이나 지역·상품에 몰려 가격 급등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일반 기업은 안정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워져 투자 의욕이 위축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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