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역이용, 28년 만에 세계 최대 은행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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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24면

금융위기가 닥치면 어김없이 ‘하이에나’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탐욕과 방만의 덫에 걸려 죽어가는 먹잇감을 낚아채 수익과 성장을 극대화한다. 위기가 진정된 뒤 금융이라는 밀림의 왕자가 될 강력한 후보들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가장 큰 먹잇감을 챙긴 하이에나를 꼽는다면 단연 뱅크오브아메리카(BOA)다. 미국 내 자산 규모로 씨티그룹에 이어 2위인 BOA가 ‘양키 금융의 격조’를 상징한다는 메릴린치를 덥석 물었다. 세계 10위권 금융회사가 세계 최대 증권사이자 3위 투자은행을 포획한 것이다. 그 대가는 500억 달러(약 55조원).

‘금융 하이에나’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백기사 전략으로 승부
‘BOA가 메릴린치를 제대로 소화만 한다’면 자산 규모가 2조600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복합 금융그룹으로 비약한다. 소매금융·증권인수·증권중개·신용카드·트레이딩 등 금융 서비스를 망라하게 된다. 씨티그룹이 90년대 처음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금융 수퍼마켓 전략에 마침표를 찍는 셈이기도 하다.

BOA는 미 금융의 변방 중 변방인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의 이름 없는 지방 은행으로 출발했다. 금융위기를 역으로 이용해 불과 28년 만에 세계 최대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것이다.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의 금융분석가 리처드 돕스는 “위기의 순간 BOA 수뇌부의 몸은 아드레날린(흥분 호르몬)으로 가득 차는 듯하다”고 말했다.

현 최고경영자(CEO)인 케네스 루이스만 봐도 서브프라임 사태가 표면화한 지난해 3월 이후 왕성하게 인수합병(M&A)을 했다. 대표적 예가 서브프라임 사태의 첫 번째 희생양인 모기지 회사 컨트리와이드다. 그리고 또 다른 희생자인 프랑스계 금융회사인 ABN암로의 미국 법인을 흡수했다.

전형적 백기사 전략이다. 금융시장이 위기를 맞아 정책당국과 금융회사들이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형식으로 자사의 이익을 극대화했다. 서브프라임 사태 초기 줄줄이 무너지는 모기지 회사 가운데 가장 큰 컨트리와이드를, 현재의 투자은행 위기 순간 미국 증권시장의 정신적 지주인 메릴린치를 흡수했다. BOA는 마치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인상을 주면서, 뒤에서는 인수 가격을 대폭 낮추고 부실 자산을 털어내는 데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관철시켰다. 여차하면 정부 당국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는 약조를 챙겨 두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는 BOA가 80년 이후 구사한 게임의 법칙이다. 루이스의 선임자인 휴 매콜 전 CEO는 해병대 출신으로 언제, 어디를 공략해야 적의 반격을 최소화하며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인물로 꼽혔다. 적의 반격이란 인수 대상 금융회사의 반발과 법적 규제를 의미한다.

매콜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88년 본격화한 대부조합(S&L) 사태 때였다. 부동산 대출을 늘리다 집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미 서민 금융회사인 대부조합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이들에 자금을 공급한 지역 은행들도 휘청거렸다. 최대 피해 지역은 텍사스주였다. 하지만 당시 노스캐롤라이나내셔널뱅크(NCNB)였던 BOA는 법규상 다른 주인 텍사스 지역 은행을 인수할 수 없었다.

매콜은 이런 법규가 대부조합 사태를 계기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 중앙은행과 은행 감독 당국을 설득했다. “위기에 처한 텍사스 지역 은행을 그대로 두면 미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며 “우리가 인수해 살려 놓겠다”고 정부를 설득했다. 사정이 다급했기에 통했다. 미 정부가 위기 처방으로 예외를 인정했던 것이다.커다란 장애물을 넘은 매콜은 이제 M&A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카드를 내밀었다. 부실 자산은 정부가 떠안아 처리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기를 막는 데 다급했던 정부는 순순히 이 조건마저 들어줬다.

"여차하면 흔들릴 수도'
이런 식으로 매콜은 자산 규모가 자사보다 큰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지역 은행들을 연거푸 사들였다. 그가 CEO 자리에서 물러난 2001년 BOA는 미국 2위 은행으로 커졌다. 단기간에 폭식하는 바람에 90년대 초반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 위기 순간 ‘백기사’였다는 점을 내세워 미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내 생존할 수 있었다. 월가의 전문가들은 “BOA가 현재 차입매수(LBO) 채권을 많이 갖고 있어 여차하면 흔들릴 수도 있다”며 “하지만 이번에 메릴린치를 인수한 공로를 감안할 때 위기에 처하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도 BOA와 비슷한 하이에나들이 눈에 띈다. 영국의 대표 은행인 바클레이스는 지난주 파산 보호를 신청한 리먼브러더스의 투자은행 부문을 사들이기로 했다. 또 다른 영국 은행인 로이즈TSB도 영국 최대 주택금융회사인 HBOS를 인수했다. 바클레이스와 로이즈TSB도 BOA와 마찬가지로 작은 지방 은행에서 출발해 고속 성장한 은행으로 꼽힌다. 맥킨지는 최근 보고서에서 “위기는 기회이면서 변화의 시작”이라며 “변화의 흐름을 잘 포착한 기업이 위기 이후 승자의 반열에 오르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BOA 등의 포식 행위로 글로벌 금융 지형이 질적으로 변화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AT커니는 이번 위기가 끝나면 3~5개 초대형 금융그룹이 세계시장을 과점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15개 거대 은행이 군웅할거하는 지금과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BOA가 가장 앞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번 인수합병(M&A)으로 생길 수 있는 후유증을 잘 극복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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