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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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남편은 역시 하이에나였다.
얼 켄트라는 이름의 그 문관에 관심을 보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보스턴의 명문가 아들이었고 영어사(英語史)전공 교수였다.영어사를 연구하다 일본어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일본어의뿌리로 보이는 한국어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한다.도쿄의 대학에서 일본어를 연구하던 중 6.25동란이 나자 지원 하여 문관자격으로 한국에 온 것이다.당시 미군 사령관은 그의 아버지 친구였다. 사령관과의 친분 탓인지,대학교수라는 신분 때문인지 켄트문관은 부대 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교수 부족에 허덕이던 한국의 피난대학측 요청을 받아들인 부대측으로부터 켄트교수는 1주일에 한번 강의 나가는 것을 허용받고 있었고■ 사령관의 비공식 고문 역할도 하고 있었다.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설명등이 주된 일거리였다.
켄트문관과 사귄다는 것은 사령관과 통하는 지름길이라 약삭빠르게 점 찍은 것이다.
남편은 그에게 청을 넣어 을희의 복학을 서둘렀다.학과도 그가출강하고 있는 영문과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켄트교수는 을희가 배우다만 사학과를 계속하기를 권했다.아니면 국문과를 택하라고 했다.가능하면 한.일 비교사학이나 비교언어학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보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사학과로 복학했다.
천막으로 지붕을 인 판잣집 교실이었으나 여자대학 캠퍼스는 활기로 화려했다.
을희는 처음으로 남편의 「능력」에 감사했다.그의 생활력이 아니면 아이를 둔 가정주부가 어찌 대학을 다닐 수 있겠는가.남편의 장사 속셈이야 어떻든 복학한 것만 고마웠다.
영문과 학생들만이 아니라 다른 학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얼 켄트교수의 인기는 높았다.그는 「켄트 백작(伯爵)」이란 별명으로불렸다.「얼(earl)」이란 낱말엔 「백작」의 뜻이 있었고,「켄트」는 고대 잉글랜드의 한 왕국 이름이었던 까 닭이다.
그는 별명답게 조용한 위엄을 가지고 있었고 준수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강의실은 다른 과(科) 청강생들로 늘 초만원을 이루었다.영어사 강의를 듣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정확하고 천천히,그리고 알아듣기 쉽게 말하려고 애쓰는 그의 강의를 통해 영어회화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유머를 섞어 풀어나 가는 강의는그 자체로도 재미있었지만 준수한 그의 얼굴에 열을 올려 드나드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판자 창문에 기대어 밖에서 엿듣고 있다가 강의를 마치고 나온그와 마주쳤다.
『오신 걸 알았습니다.』 켄트는 교문 앞에 세워둔 지프에 을희를 태웠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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