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잇단 '지도층 자살' 충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 29일 박태영 전남도지사의 사망 소식을 접한 도의회 의원과 도청 간부들이 임시회 본회의 시작 전 고인에 대해 묵념하고 있다. [광주=양광삼 기자]

비리에 연루되거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잇따라'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부패와 비리에 비교적 관대했던 과거의 관행이 점차 사라지면서 지도층 인사들이 사회적 압력과 수치를 감당하지 못해 죽음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도층의 자살은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순식간에 실추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일어난 충동자살이라고 분석한다.

한양대 사회학과 심영희 교수는 "자신의 명예.경력.부 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아노미(정신적 혼돈)적 상황에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규정한 뒤 "최근 우리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과거에는 용납됐던 행위가 비난받게 됐다"고 진단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검은 치부를 덮고, 관련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심리적 부담도 자살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 교수는 "지도층이 '세상의 모든 짐을 안고 간다'며 자살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밝힐 것을 밝힌 뒤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명예롭게 죽자'는 일본식 할복 자살과 유사한 자살 문화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자살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항의의 뜻을 표시하는 셈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동우 연구위원은 "명예의 상실이 주된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한강이란 공개된 장소에서 투신 자살한 것은 '억울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라고 서위원은 설명했다.

세브란스 정신건강병원 이홍식 원장은 "지도층의 자살은 가족에게 큰 고통을 주며 사회적으로도 손실"이라고 말했다.

◇자살 신드롬 확산 우려=사회 지도층의 자살 신드롬이 일반인에게 전염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자살사망률 4위다.

경찰에 따르면 2001년 1만2277명이던 자살자가 지난해 1만3005명으로 증가했다. 40분 만에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셈이다.

원인별로 살펴보면 염세.비관 자살이 6058명으로 제일 많았다. 낙심.실망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도 2001년 129명에서 지난해 153명으로 늘었다.

용인정신병원 하지현 과장은 "자살을 결심할 때 이전에 자살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생각한다"면서 "이런 의미에서 지도층의 자살은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했다.

이철재.고란 기자<seajay@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 日선 "명예 잃느니 자살" 풍조

최근 들어 검찰 조사를 받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자살이 뉴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하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와 관련, 일본의 산케이(産經)신문이 2000년 발간한 '검찰의 피로 (疲勞)'라는 책은 이 같은 현상의 사례와 배경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경우 검찰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자살한 경우 과거에는 사회 전반이 검찰을 떠들썩하게 성토하는 쪽이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좀더 냉정하게 그 원인을 따져보는 분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예로 1995년 한국계인 아라이 (新井)자민당 의원이 한 증권사로부터 업무와 관련된 청탁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로 국회에 체포동의 요구서가 접수되자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살한 사건을 들고 있다.

당시 공직사회는 물론 언론도 "검찰이 경미한 사안으로 무리한 수사를 했다"고 몰아세웠고, 일부에서는 '파쇼 검찰'이라는 비난까지 쏟아냈다고 한다. 그 후 일본 검찰은 대장성 관료비리 등 몇몇 대형사건 수사와 관련해서도 정치권과 관료 집단들의 성토 대상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 시각이 커졌고, 이후로는 사건의 전말에 대한 고려 없이 수사기관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태도는 사라졌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이 같은 현상을 일본의 독특한 문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는 추세라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풍조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비위 사실이 드러날 경우 엘리트 계층은 사법적 판단에 앞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다.

또 상급자에 대한 충성심 역시 자살의 한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리크루트 사건 당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의 비서가 자살한 것 등이 그런 예라고 이 책은 지적하고있다.

전진배 기자<allonsy@joongang.co.kr>

*** [곤혹스러운 검찰] "강압수사 없었는데… "

박태영 전남지사의 자살에 검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이 강압수사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 것을 우려한 듯 즉각 진상조사에 나섰다.

법무부는 朴지사에 대한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남부지검을 대상으로 지난 27, 28일 조사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있었는지 경위 파악을 벌였다. 불똥이 검찰로 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서울남부지검 이준보 차장검사도 강압수사 등의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수사 담당 검사들에게 확인한 결과 가혹행위나 강압수사는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朴지사가 이틀간 조사를 받으면서 변호인과도 서너 차례 접견했다"고 밝혔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검사와 악수까지 하는 등 좋은 분위기 속에서 수사가 진행됐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검 중수부는 이날 한나라당 측에서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자민련 이인제 의원에 대한 영장 집행을 급히 보류했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체포영장이 발부되면 즉시 구인하겠다"며 강제 집행 의사를 강력히 보였었다. 하지만 朴지사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이날 오후 "강제구인 대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李의원을 강제 구인하면서 몸싸움 등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경우 강압적인 이미지를 보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검찰 관계자들은 연신 朴지사 자살과 검찰 수사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거물급 피의자를 수사하면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얼차려를 시키거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사방식은 많이 사라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검찰 수사관의 태도가 너무 고압적이었다. 비인격적으로 대했다"는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자살 원인을 검찰 수사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최인섭 범죄동향실장은 "과거엔 문제삼지 않던 사안들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최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며 "자살은 개인적 불명예와 치욕을 씻기 위한 일종의 항변"이라고 진단했다.

하재식.문병주 기자 <angelha@joongang.co.kr>

*** [朴지사 연루 健保비리는] 부하직원이 인사 수뢰…9명 기소

박태영 전남지사가 연루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인사 및 납품비리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는 지난해 12월 시작됐다.

2000년 7월 공단 출범과 함께 초대 이사장을 맡아 이듬해 10월까지 재직한 朴지사는 국립재활원장을 지낸 임인철(59)씨를 총무이사로 기용하는 등 자신의 측근들을 공단 고위 간부로 썼다. 그게 화근이었다. 검찰은 4개월여 동안 수사해 공단 신모(47)부장이 기자재 납품 업체들로부터 리베이트 3억20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밝혀내 구속기소했다.

또 임씨와 이사장 비서실장 金모(53)씨 등이 간부 인사 때 '매관매직'을 주도한 사실도 밝혀졌다. 金씨는 인사비리를 통해 이사장 판공비를 조달하기 위해 1,2급 승진자들로부터 1억원가량의 돈을 모아 일부를 임씨에게 전달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8일 공단 관계자 9명 가운데 임씨 등 비리를 주도한 공단 간부 5명에게는 징역 2~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또 5억여원의 추징금도 선고했다.

검찰은 공단 간부들이 인사 및 납품비리로 거둬들인 불법자금의 상당액이 朴지사에게 넘어가 판공비와 전남지사 선거자금 등으로 사용됐다는 혐의를 포착, 수사를 벌여왔었다.

조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