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수술 직후 미국 비난 재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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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뇌졸중으로 북핵 검증 협상과 6자회담의 교착 국면이 장기화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 위원장의 와병이 길어질수록 북·미 관계에 대한 전향적 결단을 내리기 힘들어지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대미 강경 노선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려는 김 위원장의 뇌수술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이 보인 행보에서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점은 지난달 14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한동안 자제해 오던 대미 비난 공세를 재개한 건 그 직후인 지난달 18일부터다. 북한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동시에 담화를 내고 한·미 합동 을지프리덤가디언(UFG) 군사연습을 ‘북침 전쟁 연습’으로 규정하며 맹비난을 펼쳤다. 한·미 당국이 북한에 UFG 실시를 통보한 7월 중순 이후 한 달 이상 지켜오던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이다. 테러지원국 해제 연기에 대한 불만도 이날 처음으로 표명했다.

북핵 협상 담당 부서인 외무성은 20일 대변인 명의의 문답을 통해 UFG를 비난하며 “미국과 추종세력의 군사 위협이 계속되는 한 전쟁 억제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나흘 연속으로 대미 비난을 계속한 북한은 26일 6자회담 합의의 백지화로 이어질 수 있는 불능화 중단 성명을 발표하는 강수를 두고 나왔다.

이처럼 북한의 대미 공세는 김 위원장이 쓰러져 수술을 받은 초기에 집중됐다. 특히 불능화 중단 성명에서 ‘우리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라고 밝힌 것은 다름 아닌 군부의 목소리가 작용했음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뉴욕 채널을 중심으로 북·미 간에 진행돼 오던 북핵 검증 협상도 불능화 중단 이후 사실상 중단 상태에 빠졌다. “미국이 시료 채취 등 북핵 검증의 쟁점에서 다소 유연해진 안을 북한에 제시했으나 아직 반응이 없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은 대내 결속에 집중할 필요성이 커진 북한이 당분간 대외 관계에는 속도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결국 북핵 협상과 북·미 관계의 진전 여부는 대외 관계에 전권을 쥐고 있는 김 위원장의 회복세에 달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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