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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사랑·역사의 맛깔스러운 버무림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잊어라, 지난해 초연된 60억원 대작 ‘대장금’은. 창작 뮤지컬 사상 최고 제작비에 초호화 스태프·출연진을 망라했음에도 송승환 PMC 대표가 “쫄딱 망했다”고 회고한 불운의 대작. 50부작 드라마를 한 상에 차리려다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한 꼴이었던 기억은, 이제 잊어라.

와신상담이런가. 1년여 만에 새 옷을 입고 부활한 ‘대장금’은 전혀 다른 작품이다. 클래식·국악·힙합을 넘나드는 선율, 선 굵은 드라마, 단아하고 현대적인 의상, 역동적이고 세련된 안무까지, ‘대장금’은 한국형 뮤지컬의 새 장을 펼쳐 보인다. 지난해 공연의 흔적을 벗어버린 동시에 드라마의 족쇄마저 걷어찼다. 왕실의 치마 속 같은 아기자기한 에피소드 대신 권력·사랑·역사가 중후하게 넘실댄다. 형만 한 아우가 되는 대신, 형과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수라간 생각시로 입궁한 장금이 천혜의 미각을 바탕으로 최고 요리상궁이 되고, 역경을 거쳐 정삼품 어의녀까지 오르는 기둥 줄거리는 같다. 2008년판 대장금은 여기에 조광조의 개혁이라는 기둥을 맞세웠다. 천민 출신 장금이 유교 조선사회에서 그 정도 성공을 하게 된 것이 중종 치하 개혁세력의 등장 덕분이었다는 해석이다. 민정호·조광조·한상궁을 한 축에 두고 오겸호·최상궁을 대립시키며 군신의 충의와 갈등, 남녀 간 사랑을 부각시켰다. 이 덕분에 멜로와 서사가 어우러져 극의 비극성과 감칠맛을 살렸다.

무대에 요리를 재현하겠다는 욕심도 버렸다. 본격적인 요리 장면은 ‘어선 경연’ 정도인데, 여기서도 다채로운 색채의 소품과 ‘난타’의 타악 리듬을 응용한 듯한 도마 소리로 분위기만 냈다. 요리 대신 인간의 이야기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무엇보다 100분여 공연을 압도하는 것은 주옥 같은 노래들이다. 뮤지컬 ‘첫사랑’ 등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이지혜 작곡가가 전곡을 새로 썼다. 재즈풍의 솔로곡 ‘내가 가겠소’와 역동적인 비트의 ‘소격서 혁파’가 귀에 쏙쏙 박힌다. 특히 장중미와 서정성이 어우러지는 메인 테마 ‘뜻을 높이 세우소서’는 공연이 끝나고도 입에 감길 정도다.

공연 장소인 경희궁의 운치도 작품 감상의 또 다른 맛이다. 서울 역사박물관 옆 우거진 나무 숲을 따라 접어들면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의 불빛조차 병풍처럼 느껴진다. 고즈넉한 고궁 분위기를 해치지 않게 조명·음향을 설계했고, 암전 없이 이뤄지는 장면 전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지나 연출은 “고궁을 무대로 작품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벅찬 일”이라며 “숭정전 지붕을 활용하는 장면도 생각했으나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삼갔다”고 귀띔했다. ‘대장금’은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고궁 뮤지컬’ 공연의 네 번째로, 앞서 ‘화성에서 꿈꾸다’ ‘공길전’ ‘명성황후’가 같은 무대에서 국내외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월~토 오후 8시(일요일 공연 없음)
문의 02-721-7663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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