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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고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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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 04면

스무 살의 노래들 - 김태용
서울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모른다. 그런 내게 ‘그리움’을 일깨우는 것은 스무 살에 불렀던 노래들이다. 얼마 전 나윤선의 CD로 ‘아름다운 사람’을 들었는데, 다시 또 떠올랐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밤새 부어라 마셔라 취했던 시간들, 사람들, 그때 그 냄새까지. 그 시절엔 ‘화해하다’는 정서만 빼고 모든 게 다 있었던 것 같다. 좋아하고 미워하고 상처 주고 상처 받고,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었던 그 무렵이 그 시절의 노래를 들으면 되돌아온다.

요즘: 차기 작 시나리오 쓰는 틈틈이 충무로영화제에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 상영 연출해요.

술잔 - 남희석
기쁘고 자랑스러운 게 있을 때도, 울적해 위로받고 싶을 때도 어김없이 생각난다. 갈 때마다 설레지만 가면 늘 변함없는 곳이 고향이라면 내겐 술 한잔이 그런 존재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잔치 하는 기분도 비슷하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대상이란 것도 공통점이다. 갈 때마다 돈 드는 것도 마찬가지. 게다가 돌아올 땐 피곤하다. 그래도 진짜 고향(충남 보령)을 자주 못 찾으니 내 마음의 고향이라도 자주 찾아야지. 위스키·와인 다 거치고 요즘은 사케를 즐긴다.

요즘: KBS-2TV ‘미녀들의 수다’를 진행하면서 11월 3일 둘째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어요.

대중목욕탕 - 남궁연
태어난 집(서울 서대문구)에서 42년째 살고 있는 내게 고향이 있다면 그 옛적 대중목욕탕 아닐까. 목욕 끝나야 자장면 사준다는 부모님에게 이끌려 펄펄 끓는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했던 그곳. 아버지의 지갑은 늘 두둑한 줄 알았고, 엄마와 함께 여탕 들어간 남동생이 내 동창 누굴 만났는지가 마냥 궁금하기만 했던, 내 인생의 ‘황금기’. 지금 그 목욕탕 자리엔 카페 건물이 들어섰고, 부모님은 사진으로만 남아 계시다. 결국 모든 사람의 마음의 고향은 엄마·아빠의 품이 아닐는지.

요즘: 중앙일보에 자동차 칼럼 ‘남궁연의 인카문명’을 연재하면서 밝힐 수 없는 새 직종에 적응 중이어요.

종로서적 - 박현욱
고등학생 때 종로 2가에 기타 배우러 다니며 종로서적을 자주 들렀다. 같은 대형 서점이라도 교보문고는 지하 단층 매장에 책이 꽉 차 있어서 더 크고 화려한 느낌이었는데, 종로서적은 층별로 분야가 달랐고 분위기도 달랐다. 내가 살던 은평구엔 당시만 해도 구립도서관이 없었고, 동네 서점에는 서서 책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종로서적의 드높은 서가 사이에서 원 없이 책을 읽었다. 꼭대기 층에선 가끔 ‘작가와의 대화’가 열렸는데, 처음 보는 소설가란 사람들을 신기하게 보곤 했다.

요즘: 유럽 축구 시즌이 시작해 주말에 그 재미로 살아요. 올해 안에 단편집 하나 나온답니다.

카페 ‘파라’- 백영옥
트렌디한 소설 『스타일』을 썼다고, 내 마음의 고향이 백화점이나 명품 아웃렛인 건 아니다. 오히려『스타일』을 썼던, 고려대 법대 후문 근처 카페 ‘파라’가 고향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노트북 콘센트를 꽂아 쓸 수 있는 곳 어디든 작업실처럼 일하는 내게, ‘파라’는 편안한 은신처였다. 창문 너머 지나다니는 대학생들을 보며 지나 버린 시간들을 회상하기도 했고, 관찰한 내용을 소설·에세이에 반영하기도 했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친구들이 모이던 카페처럼 도시와 나를 이어 주던 그 공간.

요즘: 최근 이사한 작업실 근처에 길고양이가 많네요. 겨울에 발표할 소설 쓰고 있지요.

배낭 - 유성용
여행자에게 배낭은 여행자임을 표시하는 신분증이자 어깨에 지고 다니는 집이다. 배낭을 메고 가는 곳 어디라도 고향이 된다. 어쩌면 여행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이들인지 모른다. 가는 곳이 고향이고, 그곳에 극진하는 게 여행자의 삶이다. 2003년부터 2년 반 정도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와 『여행생활자』라는 책을 썼다. 세속적인 일상을 떠나 그곳에서 만난 세속의 사람·장소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몽중몽(夢中夢)처럼 나는 두 겹의 인생을 사는 기분이다.

요즘: 여행과 일상의 분간 없이 살아요. 얼마 전 멕시코·이란에 다녀왔고요, 곧 아르헨티나에 갈 것 같아요.

부모님의 미소 - 이병우
서울에서 나고 자라 고향이랄 게 따로 없다. 나이 들고 보니 영원한 내 마음의 고향은 부모님의 미소인 듯싶다. 일흔 아홉, 일흔 일곱 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분들이 평화롭게 늙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먼 미래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제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은 나이다. 명절이면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오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선지 자주 여행 충동을 느끼는데, 특히 부산에 가 바다를 보면 아늑하고 편안하다.

요즘: 드라마 ‘바람의 화원’ 음악 작업을 하면서 10월 22일 세종문화회관 콘서트 준비 중이에요.

이태원·동인천 음반가게 - 임진모
오십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이태원·동인천 일대의 소위 ‘빽판(LP 레코드 불법 복제판)’ 가게를 돌며 새로 나온 신보를 사던 때가. 1977년부터 79년까지 나는 학교만 마치면 빽판 가게로 달려갔다. 당시 빽판 하나가 거북선 담배 한 갑 값(330원)이었다. 음반을 사기 위해 담배를 줄여야 하는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원망하며 나는 ‘앞으로 돈을 두 배는 벌어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기도 했다. 요즘도 그때 모은 3000여 장의 빽판을 볼 때면 그 설레던 환희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온다.

요즘: 라디오 고정 출연 10군데 하면서 밀려드는 원고를 쓰자니 담배도 음악도 못 끊어요.

창덕궁 - 장광효
지난해 추석에는 창덕궁에 다녀왔다. 정해진 입장 시각까지 기다렸다 가이드를 졸졸 쫓아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충분히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많은 이가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하는 추석 같은 명절이면 나는 이렇게 고궁을 찾는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늘 새로운 것, 트렌드, 미래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가끔은 그 숨 막히는 긴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탄 듯 안정감 있는 옛 공간에서 마음과 머리를 쉬곤 한다. 실제로 콘크리트 빌딩 사이에서 진짜 초록색 숲의 기운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도 바로 고궁이다. 이럴 때는 카메라도 없이 가볍게 다닌다. “내가 오늘은 이 속에서 좀 놀아야겠다” 하면서 맘먹은 대로 제대로 음미하고 관조하면서.

요즘 : 2009년 봄·여름 컬렉션 준비로 명절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보냅니다. 그렇지만 메리 추석!

서해 바다 - 정혜윤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거나 반대로 아주 심란한 마음을 쉬고 싶을 때 나는 서슴없이 서해안 바닷가를 꼽는다. 동해의 들썩이는 파도나 남해의 고운 모래사장이 아니라 끝없는 갯벌로 이뤄진 그곳은 여느 바다 빛깔보다 탁해 오히려 차분한 느낌을 준다. 여름의 찬란한 태양보다 무르익어 가는 가을이 더 어울리는 곳, 사람들이 조개를 캐 생계를 유지하는 삶의 터전. 오해받고 상처 받은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때 그 바다를 보노라면 큰 심호흡을 하게 된다.

요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1인과 그들이 꼽은 책을 다룬『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출간했어요.

비 - 주철환
내게 아득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비. 비만 내리면 그곳이 어디건 다 내 고향 같다. 불현듯 잃어버린 것들이 생각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기상예보 캐스터가 “내일은 날씨가 좋습니다”라고 말하면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맑은 날씨가 내겐 좋은 날씨가 아니니까. 비는 내게 여섯 살 때 떠나온 고향(경남 마산)처럼 어딘지 낯설기도 하다. 비를 좋아하면서도 피하는 심정이 그러하지 않은가. 바라만 보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애증의 대상. 사랑하면서도 끝내 피하는 그런 고향.

요즘: 얼마 전 외아들이 군대에 갔습니다. 다음달 OBS 신입사원 공채 때 듬직한 아들·딸이 많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죠..

뉴욕 - 최범석
‘마음의 고향’이 남들에게는 언제라도 평안함과 따뜻함을 주고 그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나는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에 기대감이 더 크고 그런 곳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기분이 나쁘고 힘들 때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 단골 술집을 찾지만 나는 차라리 낯선 술집에 가 안 먹어 본 와인 마시기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반드시 어떤 곳을 지칭해야 한다면 뉴욕을 꼽겠다. 2002년 처음 만난 뉴욕은 ‘참 후지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후 갈 때마다 도시의 표정이 달라져 늘 새롭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의 진짜 ‘마음의 고향’은 ‘새로움’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 곧 출간될 라이프 에세이집 『최범석의 아이디어』마무리로 바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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