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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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가 불을 켠 채로 나왔었나봐요.』 아리영은 집안의 불빛을바라보며 현관 문을 열쇠로 땄다.우변호사와 그의 아내 일로 실타래 헝클어지는 듯한 일상이다.아침에 불을 켠 채로 허둥지둥 나온 것일까.민망했다.
그러나 현관 안에 들어서자 리빙룸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소스라쳐 비명을 지르고 아버지 등 뒤에 숨었다.
『누구요?』 아버지가 침착하고 육중한 소리로 물었다.누군가가가죽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같았다.
『아니!』 포도주색 꽃무늬를 박은 스탠드 글래스 가리개 옆으로 리빙룸을 들여다본 아버지와 아리영은 동시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길례여사가 아닌가.
수밀도(水密桃)빛 원피스가 그녀의 얼굴을 유난히 파리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정여사님!』 아리영은 뛰어가 껴안았다.정여사도 아리영을 힘껏 안았으나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젖은 목소리로 반겼다.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사람의 말투였다.
정여사의 검은 눈에 금방 눈물이 부풀어 일더니 오열이 새어나왔다. 『좀 앉으셔요.』 아리영은 그녀를 소파에 앉혔으나 정여사는 물렁한 솜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졌다.혼절한 그녀의 손에서 크리스털 알을 매단 열쇠가 떨어져 전등빛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현관 열쇠였다.
-정여사가 왜 우리집 현관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의아해 할겨를도 없었다.
『냉수 가져와!』 황급한 아버지의 말에 냉장고 안의 생수를 컵에 따라 서둘러 들고갔다.
아버지는 찬물 한모금을 입에 물더니 정여사 얼굴에다 대고 안개처럼 뿜어냈다.그녀의 입에다 물을 따라넣기도 했다.물은 넘어가지 않고 입술가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또 한모금의 물을 머금고 정여사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대어 들여보냈다.
정여사가 약간 움직였다.
『네 방으로 모시고 가자.』 아버지는 정여사를 안아올려 아리영 방으로 들어가 보료 위에 눕혔다.
『열이 있어.찬 수건을 가져오지.』 기민한 간호사처럼 찬 타월을 짜들고 방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정여사가 껴안고 울고 있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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