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한계에 부닥친 러시아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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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6일 실시된 러시아 대통령선거는 분명 역사적인 사건이다.
피와 공포의 역사로 점철된 러시아 역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이시오프 스탈린의 계승자가 자신의 권력을 선거라는 형식의 도박에내걸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공산독재체제아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宮)안이나공산주의자들의 음산한 모스크바 사무실안에서 음모를 통해 결정하던 나라의 장래를 투표소라는 민주적 장소로 옮겼다는 점도 사상최초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가운데 1차 투표에서 공산주의자가 우세할 경우 2차 결선투표를 취소할 것이라는 소문들도 나돌고 있다.
이미 1차투표의 유세과정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옐친 대통령은 국가의 조직을 남용했고,뒤늦게 봉급과 연금을 주기위해 공공재정을 바닥냈으며,민간방송을 포함한 TV매체를자신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고,체첸휴전을 선거용으 로 이용했다.
따라서 옐친이 승리하더라도 전제주의 암흑으로부터 자신들의 국가를 평화적으로 구출해낸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나 체코의 바츨라프하벨과 같은 역사적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 주가노프 후보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과거 공산당의 막강한 조직과 자신의 언론및 부(富)를 마음껏 이용했다.그는 국수주의적 구호와 반유대인적 독설및 선동적인 말들을 뿜어내며 올연초 스위스 다보스 국제경제포럼에서 서방 경제인 들에게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동떨어진 채 스탈린의 잔영을 연상시키고 있을 뿐이다. 옐친과 주가노프 사이에서 유권자들은 망설이고 있다.
유권자들은 또 다른 대안과 제3의 후보와 미래에 대한 진정한토론등을 원했을 것이다.즉 이번 선거를 통해 과거의 악몽을 되살리기보다 새로운 사회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수세기에 걸친 암흑상태에서 아무런 대가도치르지않고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볼셰비키혁명이 70년동안 시민사회를 질식시켜왔다는 사실,옛 소련제국 해체가 급격한 동요없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들을 순진하게 망각한 채 투표한다.
러시아는 옐친 대통령과 함께 마치 전제군주가 기분에 따라 보통선거를 베푸는 것과 유사한 독재적이면서 이질적이고 혼란스런 체제가 정착됐다.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선거없이는 성취될 수 없지만선거가 모든 것은 아니다.권력에 대한 견제세력,언론의 자유,사법부의 독립등 러시아가 최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이런 요소들이 수반돼야 한다.러시아의 많은 민주주의자들은 공산당이 일단권력을 장악하면 이같은 선거조차도 다시 치르지 않을 것임을 꿰뚫어보고 옐친의 승 리보다 주가노프의 패배를 더 원하고 있다.
역사의 발전은 후보가 아니라 선거 그 자체가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고대훈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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