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통일 이후 법치주의 준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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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집회는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폭력은 없어야 한다.”

유타 림바흐(74·사진) 전 독일 헌법재판소장은 2일 회견에서 독일 시위문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개막한 세계 헌법재판소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독일에서도 최근 신나치주의자들의 집회·시위를 허용하지 말자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며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예로 들었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시위도 허용돼야 하지만 폭력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림바흐 전 소장은 1994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에 취임해 2002년 정년퇴직했다. 베를린자유대 교수와 베를린 법무장관을 지냈고 현재는 독일문화원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헌재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면서 “독일의 연방 헌법재판소는 국토의 동북부에 있는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부 소도시 칼스루에에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정치권과 법원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거리상으로도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독일의 주요 기관들은 베를린에 있지 않고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그는 “독립적인 법관을 만들기 위해선 공정한 선발 시스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림바흐 전 소장은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해 “한국도 통일 이후의 법치주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통일 이후 서독의 법치주의가 동독에 적용되면서 이에 익숙하지 않은 동독 주민들에게 많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적용 가능한 법이 무엇인지 등 예측할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작고한 재독 작곡가 윤이상씨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법이 아닌가”라고 말문을 연 그는 “독일은 한국처럼 분단 경험이 있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국가안전법이 있었지만 나중에 위헌으로 판결났다”고 소개했다.

그는 “구체적인 사건을 전제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윤이상씨를 한국에 돌아올 수 없게 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야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윤이상씨는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한국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2년 가까이 복역하다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69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독일로 떠났다. 71년 독일에 귀화한 그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95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림바흐 소장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만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김승현 기자,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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