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누가 내일을 준비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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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0년에 한번씩 세계를 놀라게 하는 역작(力作)을 발표한다.곧 닥칠 미래의 격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다룬 그의 제1작 『미래의 충격』은 70년에 발표됐다.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제3의 물결인 정보화사회 진입을 예고한 제2작 『제3의 물결』은 80년에 나왔다.정보화시대의 권력구조는 폭력과 돈에서 지식으로 이동한다는 제3작 『권력이동』은 90년에 발간됐다.
10년 단위로 미래 사회를 내다본 그의 예측력은 뛰어났고 사실 세상은 그의 예측대로 바뀌고 있다.그런데 93년에 또 한권의 책이 이례적으로 나왔다.『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the post-modern age)』 라는 책이다.이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미국이 어떻게 제국으로서의 힘을 축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82년 4월12일 토플러 부부는 낯모르는 한 장군의 저녁 초대를 받는다.육군대장 돈 모레리는 제3의 물결인 정보화시대에 군 조직과 병기체제를 어떻게 갖춰야할지를 연구하는 팀이 국방부에 편성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정보화시대에 적합 한 군사이론을 개발하는 것이 임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육군대장과 미래학자는 늦은 밤까지 미래사회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미군의 최대 문제점은 무엇인가』『전략이 기술을 움직이는게 아니고 기술이 전략을 움직이고 있 다』『베트남 전쟁 이후최대의 변화는 무엇인가』『정밀유도 병기의 탄생이다』『핵전쟁은 피할 수 없는가』『피할 수 있지만 현재방식으로는 안된다』『당신은 왜 나의 시간철학에 관심이 많은가』『앞으로의 군은 공간지향에서 시간지향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등의 대화가이어졌다.
82년이면 미국이 베트남 패전의 깊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이고 불치의 암을 앓고 있다는 49세 장군의 열정적 호소에 토플러는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전쟁과 평화』의 저술을 승낙하게 된다.
한 장군의 강한 문제의식과 미래학자의 예측력,그리고 펜타곤의풍부한 자료가 합쳐져 정보화시대의 전쟁억지와 평화구축이라는 전술서가 10년뒤 공개된다.
91년 걸프전 당시의 전쟁형태는 바로 공간적 전투가 아닌 시간적 개념의 하이테크 과학전쟁이었음은 이런 군사전략가의 오랜 공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교수 새뮤얼 헌팅턴의 역저 『문명충돌론』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93년 포린 어페어스 지에 발표되었다.향후 세계의 분쟁은 이데올로기나 경제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문화 또는 문명간 대결구도가 될 것이라는 헌팅턴의 예측은 미국 국무부연구용역의 결과였고 세계 분쟁은 보스니아와 중동에서 바야흐로 그의 예측대로 인종간.종교간 대결로 치닫고 있다.
한편의 논문이 발표되기까지 정부와 군인과 학자가 공동으로 미래를 연구하고 실제로 그 결과를 현실에 적용하는 미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전략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는 컴퓨터를 병사의 휴대용 기본장비로 바꾸는 연구까지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미래를 위해 무엇을 투자했고 어떤 합의를 도출했는가.21세기를 준비하는 각종 위원회가 있었지만 우리 앞날을 비춰줄 구체적 청사진이 아직껏 없다.
누구나 바라는 통일이지만 통일의 방식이 어떠해야 할지 구체적 정보에 입각한 현실적 프로그램이 제시된 바도 없고 그저 주먹구구식 희망사항으로 남아 있다.이러니 여론에 밀려 쌀을 주었다 말았다하는 시행착오가 거듭된다.
앞날을 위해 착수했던 고속철도는 3년이 넘게 노선 선정으로 허송세월하고 있고,신공항 건설은 기본계획이 수없이 바뀌면서 언제 완공될지 예측조차 어렵다.
지하 가스관이 언제 터질지,겉으로 멀쩡한 다리가 언제 무너질지 두려운 나날을 보내는 도시생활이다.분뇨를 상수원으로 흘려보내고 오존이 하늘을 덮으며 전국 교통이 꽉 막혀 있지만 서울시의 2000년대 청사진은 언제나 살기 좋은 쾌적한 분홍빛 서울이다. 잘못된 예측,예측을 실현시킬 구체적 노력 없이 밝은 미래가 공짜로 오지는 않는다.국회는 여야간 힘겨루기로 개원도 못한 휴업상태고,국민건강을 책임진 약사와 한의사는 3년여 밥그릇싸움에 열중이지만 정부의 조정능력은 바닥이 났다.일부 산업현장은 여전히 노조 내부의 힘겨루기로 검은 전운(戰雲)이 시시각각몰려오고 있다.
누가 내일을 위한 준비를 과연 하고 있는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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