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인도를 휩쓰는 한국 기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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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코끼리 다리 만지기라더니. 거대한 '코끼리 나라' 인도를 찾아간 나야말로 바로 그 짝이었다. 하지만 어느 다리가 됐든 간에 다리라도 만져봐야겠다는 심산으로 후배 기자와 함께 2주간의 취재를 다녀왔다. 인도의 급부상은 이미 세계의 비상한 관심사. 중국이 세계의 제조업을 다 휩쓸어가고 있다면, 21세기 신서비스산업은 인도가 그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판이 아닌가.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부쩍 인도에 관심이 커지는 상황이라, 도대체 무엇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느껴보고 싶었다.

*** 日기업, 국내 업체에 OEM 납품

"인도경제도 조만간 제2의 중국이 되는 것인가." "인도가 세계 IT산업의 새 강자로 부상한다는데 정말 그 실체는 무얼까." "인구 10억이 넘는 세계 최대의 인도 민주정치는 대체 어찌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머릿속에 담고 여기저기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다녔다. 어쩌면 이렇게도 무지했던가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본격적인 취재기는 별도 기사로 하기로 하고 우선 예고편 삼아 소개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인도시장의 한국기업들이다. 내가 무지했던 것은 인도경제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한국기업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도 깜깜했다. TV에서 그런 장면을 스쳐 보긴 했으나 으레 나오는 홍보성 프로그램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메이드 인 코리아가 휩쓰는 나라를 보지 못했다. 컬러텔레비전.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자동차.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단연 한국제품이 압권이었다. 굳이 시장 점유율이 몇%이고, 수출금액 통계숫자가 어떤지를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과장을 좀 하자면 "아니, 이럴 수가 있나"할 정도로 현대자동차에다 LG.삼성의 전자제품이 판을 치고 있었다. 텔레비전 광고도 프라임 타임마다 되풀이됐고, 거리의 요지마다 이들의 입간판이 대문짝만하게 내걸려 있었다.

제품이든 광고든 일본이 한국의 기세에 눌려 이처럼 기를 못 펴고 있다니. 그것도 인구 10억3000만명의 거대시장 인도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덤핑 작전을 펴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 어느 시장에서보다 고급 제품 대접을 받고 있었다. 혼수 장만은 LG전자 제품으로 하는 것이 청춘남녀의 꿈이라 했다. 인도 현지에서 세탁기를 생산하는 일본전자회사 파나소닉은 3년 전부터 삼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납품한다고 했다. 파나소닉 브랜드로는 잘 안 팔리고 삼성 브랜드로 해야 잘 팔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 유명 기업이 한국기업에 OEM 납품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한국기업들의 인도 진출이 본격화한 게 오래 전도 아니다. 1995~96년께 시작했다가 97년 금융위기를 맞아 완전 철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망한 대우가 인도자동차 시장에 뛰어들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성가를 결정적으로 높였다고 한다. 아무튼 삼성.LG.현대자동차는 인도에서 일류 국제기업으로 통한다. 코리아라는 나라 이름보다 이들 회사 이름의 지명도가 더 높다. 인도의 유명 대기업인 릴라이언스.타타그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기업들은 최근 들어서야 열을 받았는지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단다.

*** 정부도 '인도 시대'에 대비해야

사실 인도와의 비즈니스는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나있다. 바로 그런 비즈니스 환경이 한국기업의 성공 비결이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정부 정책과는 아무 상관 없이 기업들 스스로가 제 책임으로 죽기살기로 인도시장을 돌파해 냈다는 것이다. 인도 경제가 급속히 커지고 국제적 영향력도 갈수록 막강해질 게 뻔한데, 한국제품에 대한 이미지가 이처럼 좋게 된 것은 정말 잘된 일이다. 국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정부가 제 아무리 돈 쓰고 외교한다 해도 이만큼 잘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기업이야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도 알아서 잘해 나갈 것이다. 문제는 정부다. 지금부터라도 '인도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오지(奧地)로만 우습게 알 일이 아니라 미.중.일에 이어 인도를 외교 차원에서도 빅4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조만간 세계를 쥐고 흔들 엄청난 잠재력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말이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