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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생명 구한 네 번의 ‘기적 릴레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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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01면

기적① 복지사의 손길
“비싼 수술비에 삶 포기한 여인 방송국에 사연 보내 새 희망을 찾아줘”

간 떼어준 딸의 효심이… 공무원·의사의 배려가…

지난해 9월 7일. 대전시 월평2동 주민자치센터(옛 동사무소)에 병색이 완연한 작은 체구의 방차영씨가 들어섰다. 20년 가까이 버텨온 간경화와의 싸움을 포기하려는 참이었다. 간세포암으로 진전된 방씨에게 의사는 마지막으로 통보했다. 남은 희망은 간 이식뿐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1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하지만 기초생활수급자인 방씨로선 3000만~4000만원 든다는 수술비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회복지 공무원인 조신영(35·여·사진)씨가 방씨를 맞았다. “어디 조용히 요양하다 죽을 곳 없을까요?” 사연을 털어놓던 방씨가 흐느꼈다. “그런데 딸이 눈에 밟혀서….”

조씨는 당장 “무슨 소리냐”고 나무랐다. 왜 죽을 생각부터 하느냐고. 그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모금 프로그램인 KBS-TV ‘사랑의 리퀘스트’를 통해 환자에게 수술비를 마련해줬던 경험을 떠올렸다. 방씨를 설득해 각종 서류와 사연을 정리해 ‘사랑의 리퀘스트’와 연결된 한국복지재단에 수술비 지원을 신청했다. 긍정적인 반응이 왔지만 시간이 다급했다. 조씨는 일단 수술을 진행시켰다. 우선 구청 등을 통해 기초검사비로 긴급지원금 350만원을 마련해 방씨에게 전해줬다. 서울대병원에서 1월 말 수술 날짜가 잡혔다. 복지재단 측의 확답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조씨는 ‘사랑의 리퀘스트’와 비슷한 성격의 라디오 프로그램도 알아봤다. 될 때까지 여기저기 두드려볼 요량이었다. 수술을 열흘쯤 앞두고 드디어 복지재단에서 20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알려왔다. 방씨는 1종 의료급여 대상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조씨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기적② 고3 딸의 결심
“엄마가 필요하면 간 줘야지 작정 엄만 내 교복 입고 첫 가족사진 찍어”

엄마가 간 이식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을 때 가이는 다른 대답은 상상도 못했다. “알았어, 엄마. 대신 나 고3 되기 전 겨울방학 때 빨리 하자, 응?”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선생님이 간은 잘라도 다시 자란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 가이는 항상 간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했다. ‘나중에 필요하다면 내 간을 잘라줘야지’. 이제 그게 현실이 된 것뿐이었다.

수술을 받으러 서울로 가기 며칠 전, 모녀는 동네 사진관을 찾았다. 1998년 방씨가 이혼한 후로 가족 사진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탓일까. 둘이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 없었다. 방씨는 가이의 교복을 나눠 입었다. 가이의 교복 블라우스와 조끼가 자그마한 방씨에게도 맞았다. “자, 찍습니다, 웃으세요” 하는 사진사의 말에 방씨는 그만 웃음 대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적③ 의사의 新의술
“장기 떼어준 뒤 절망하는 효녀들 흉터 최소화 수술법 위로됐으면…”

서울대병원 서경석 교수(사진)팀은 10대 소녀인 가이를 위해 절개 흉터를 최소화하는 수술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부모에게 장기를 떼어주고 흉터 때문에 절망하는 가이 같은 효녀들을 도와주기 위해 개발한 신(新)시술법이었다. 1월 21일 오전 8시. 드디어 수술이 시작됐다. 가이가 먼저였다. 오전 11시쯤 방씨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가이의 간을 절제하고 흉터를 최소화하면서 봉합하는 데 8시간25분, 방씨가 이식을 받는 데 10시간45분 걸렸다. 수술은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두 모녀의 사연을 담은 ‘사랑의 리퀘스트’가 방영되던 2월 2일, 가이가 먼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기적④ 딸의 종양 발견
“잘라낸 간 CT 찍다가 난소 종양 찾아내 이 모든 게 모녀의 행운… 감사하다”

8월 27일 서울대병원 3층 병동. 이번엔 환자와 보호자가 바뀌어 있었다. 전날 난소의 종양을 떼내는 수술을 받은 가이의 곁에 방씨가 딸의 손을 꼭 잡은 채 앉아 있었다. 자신도 아직 환자나 다름없지만 방씨는 그저 감사하고 흐뭇한 표정이다. “내가 그냥 죽었으면 우리 가이를 누가 이렇게 봐줄 수 있었겠어요.”

간 이식 수술 후 지난 3월 잘라낸 간의 상태를 확인하는 CT 검사를 받았는데, 사진 끄트머리의 난소 부위가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재검사 결과 종양이 발견됐다. 가이가 엄마에게 간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 남았다면 자신의 병도 발견하지 못한 채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수술을 한 정현훈(산부인과) 교수는 “일찍 발견한 덕분에 난소와 난관이 서로 꼬이는 응급상태를 면했다”며 “종양 크기가 9㎝가 넘을 만큼 크지만 다행히 양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가이는 잘라낸 간이나 난소의 혹은 벌써 잊어버렸다. 지금은 온통 코앞으로 다가온 수능시험 생각뿐이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방송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는 가이.
모녀는 29일 대전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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