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북핵 대화’ 파국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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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한이 불만을 표출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이 “45일간 신고서를 검증한 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할 것”이라고 했음에도 미국이 해제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검증체제를 둘러싼 이견도 만만치 않다. 7월 10∼12일 제5차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는 ‘6자회담 틀 내에서의 검증체제 수립’에 합의했고, 이를 위해 비핵화 실무그룹이 대화를 시작했었다. 이때 이미 전문가들은 검증의 강도에 합의하는 것이 최대 난관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미국으로서야 당연히 시료 채취, 의혹시설 불시 방문 등이 포함되는 특별사찰을 원했지만 북한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미국은 이를 이유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북한 인권 발언,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등 북한이 후일을 기약하면서 한번쯤 몽니를 부려보고 싶은 사안들이 많았다.

 아직은 북한 외무성 성명이 곧바로 핵 대화의 파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선, 미국과 북한이 4월 싱가포르 회동을 통해 교착상태를 깨고 ‘합의 가능한 부분에 대한 합의’를 통해 관계개선을 시도케 했던 정치·경제적 상황은 지금도 불변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라크전쟁, 악화일로의 아프간 사태,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등으로 부시 대통령의 정치입지는 여전히 취약해 강경 선회가 쉽지 않다. 북한도 그렇다. 미국의 식량원조는 북한의 식량난 타개를 위해 긴요하며, 남한 정부와의 기싸움을 지속하기 위해서도 미국과의 우호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명분 문제도 있다. 7월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에서 2008년 10월 말까지 상호 의무이행을 완료하기로 합의해 놓고, 그 시한이 경과하지 않은 시점에 핵 대화의 판을 깨버릴 명분은 어느 쪽에도 없다. 이런저런 정황들을 종합할 때, 북한이 원하는 것은 파국이 아니라 진행 중인 검증체제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중장기 핵 해결 전망은 여전히 어둡고 불투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검증체제가 수립되더라도 핵 해결에 실제로 기여할 것인가 하는 것도 궁금하지만, 본격적인 핵무기 폐기를 위한 3단계 협상이 과연 열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다. 현재 의제에서 제외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UEP)의 존재 여부와 북한·시리아 핵 협력 의혹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북한이 ‘최소 핵 억제력’ 명분을 앞세우고 보유 중인 핵무기와 핵 제조 인프라들을 고수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한국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해야 할 중차대한 사안이다.

북한은 이번에도 “한반도와 그 주변에 미국 핵무기가 통과해서도 안 된다”면서 1990년대 초 주장했던 ‘조선반도 비핵화 방안’을 재등장시켰다. 북한의 관리들은 잊을 만하면 “미국은 핵을 가진 북한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단순한 협상용인지, 핵무기 고수를 위한 논리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하지만 한반도에 짙은 핵 그림자를 드리우는 언행임에는 틀림없다. ‘북핵 폐기가 곧 한반도 비핵화’라는 미국 버전에 익숙해 있고 이를 붙들고 있는 워싱턴의 관리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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