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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의 입' 9년] 31. '유신 철학' 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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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지하 사격장에서 권총을 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개혁에 착수한 후 한 외신기자와 단독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기자의 개인 사정으로 활자화되지 못했고 오로지 나의 메모로만 남아있어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 메모는 유신에 대한 박 대통령의 철학이 압축된 생생한 역사기록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먼저 "북측이 남북대화에 성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으면서 북한이 무장간첩을 침투시키고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온 사실 등을 예시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은 미군 철수, 반공법 폐지, 연방제 실시 그리고 대(大)민족회의 개최 등 일방적인 제의 만을 들고나와 정치선전을 노리면서 우리의 내부체제를 혼란에 빠뜨리려 기도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매사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한국의 특수성'에 관해 설명했다.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민주주의 모델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는 코스는 모든 나라가 똑같아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한국의 여건에, 그것도 특수여건에 알맞은 민주주의 성장코스를 밟아 가야 한다. 한국이 걷는 코스가 한국적 민주주의다.

한국의 특수성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미국이나 일본 국민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둘째, 북쪽은 우리를 계속 위협하고 있다. 무력으로 공산화 통일을 하겠다고 기회를 넘보고 있다. 어린애들한테도 김일성 우상숭배론.유일사상.주체사상의 사상교육을 시키고 있다. 공산화 통일을 대를 이어 끝까지 추진하겠다는 의도다. 북한의 방대한 군사력은 중공이나 소련 또는 일본과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특수여건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길을 밟아야 하겠는가. 다른 선진국과 똑같을 수 있겠는가. 1960년대 초 쿠바에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세웠을 때 미국 정부는 어떻게 했으며 국민들은 얼마나 불안해 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보면 한국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미국 정치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특수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민주주의를 확실히 성장시키고 있다. 우리의 고충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의 유신도 이같은 어려운 여건 하에서 민주주의를 성장시켜 나가려는 고심의 일단이다.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자유.번영을 추구해 나가자는 우리 나름의 고심작이다.

우리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폐단.낭비 그리고 비능률적 요소를 과감히 제거하고 국력을 빨리 조직화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이것이 10월 유신이다. 평가는 후세 사가(史家)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했다."

박 대통령은 비장한 결단을 피력하면서 회견을 끝냈다. 한참 동안 엄숙한 공기가 회견장을 감쌌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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