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과학자.작가 망명-장해성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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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때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했다가 50년 7월20일 대전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장승록.당시 26세)덕택에 혁명열사 유가족으로 유년시절을 어려움 없이 보냈다.
김일성호위국(83년 김일성호위총국으로 개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76년 철학부를 졸업했다.그 뒤 김정일이 발족했던 3대 혁명소조의 지도원으로 일하다 79년 중앙방송위원회의 기자로 배치됐다.
글을 잘 쓴다는 평가를 받아 85년 작가로 발령받았다.탈출 전까지는 2급 작가의 직책으로 라디오 드라마용 원고를 집필했다. 북한 탈출의 계기는 지난해 가을 김정일의 고향 취재를 하면서 생겼다.항일투사와 김정일 고향 등을 취재,김정일의 어린시절을 우상화하는 작업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김정일 출생지가 북한이 아닌 소련이고,그의 소년시절 비행만 잔뜩 알게 됐다 .
흉금을 터놓고 지냈던 동료 작가 송금철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이것을 당국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송금철이 지난해 10월29일 국가안전보위부에 붙들려갔다.불안감 속에 방송 창립 50돌행사가 있었고 11월18일엔 김정일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마침내 11월24일 보위부에서 찾아와 자백을 강요했다.완강히부인했으나 세번째 조사때 『송금철이 다 불었으니 포기하라』고 협박했다.이젠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선 김정일이 만든 10대 원칙이 있다.이는 북한의 모든법령을 초월하는 것이다.그중 하나가 「金부자에 대한 비방 금지」였는데 나는 이를 위반한 것이다.
96년 1월14일 보위부의 이정현 책임지도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열흘 후엔 체포된다는 것을 눈치챘다.탈출을 결심하고 지난53년 재가한 어머니를 찾았으나 아무 말도 못했다.어머니조차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월21일 술을 얻으러 간다며 평양에서 양덕군까지 갈 수 있는 통행증을 받아 이를 청진.선봉까지 가는 통행증으로 위조했다.기차를 타고 선봉에 도착했으나 비표가 달라 붙잡혔다.
그러나 작가 신분임을 인정받아 곧 풀려나 20일 강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5백정도 가다가 두만강으로 뛰어내렸다.이 때 쇄골(빗장뼈)이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다.
북한 보초병이 뒤에서 총을 겨누며 『돌아 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중국 갔다 올 때 맥주하고 담배 갖다 줄테니 내일 시간 맞춰 여기에 나와 있기나 하라』고 오히려 고함을 지르자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본래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출신이라 친척이 많았으나 친척들은 화를 입는 것을 두려워한 탓인지 정작 도움 주기를 기피했다.
룽징(龍井).톈진(天津).베이징(北京).옌지(延吉)를 떠돌다홍콩행을 결심했다.나처럼 북한을 탈출해 옌볜(延邊)지역을 떠도는 북한 사람들 이야기를 10여건 들었다.그러나 베이징 한국대사관에서는 망명이 허용되지 않아 홍콩으로 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탈출한 지 4개월이 돼 가던 5월12일 중국 남부 선전(深수)에 도착한 뒤 14일 홍콩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홍콩 도착후 즉시 한국 망명을 신청했다.
홍콩=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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