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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의 에너지를 살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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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나라는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를 따내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체 7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선수들은 사력을 다해 뛰었고, 국민들도 나라를 들썩이는 함성으로 응원했다. 인터넷에는 올림픽 기간 내내 각자 자기 의견을 올리고 토론도 하며 의기투합도 했다.

우리 독도에 일본이 시비를 걸어왔을 때, 정부보다는 국민들이 먼저 나서 영토수호의 활동과 독도에 대한 외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오류를 찾아내 이를 바로잡고, 외국 언론에 독도에 관한 광고도 냈다. 이 일에는 젊은 세대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뒷골목의 숨은 춤들이 전 세계 최고의 비보이를 탄생시켰다. 젊은이들의 상상력으로 한국은 온라인게임의 전 세계 본산이 되었고, 한류 스타들이 세계를 누비고 있다. 인터넷에는 온갖 아이디어들이 백출하고, 국가의 정책에 대해 각자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정치에 대한 참여와 비판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재래시장이나 돌아다니는 기성 정치인의 낡은 행태는 이제 설 땅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현 단계 한국 사회의 특징이고,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를 신바람이니 한국적 감성이니 하기도 하지만, 한국이 21세기에 들어가며 뿜어내는 ‘한국민의 에너지’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뜨거움도 단순히 좌파의 선동에 이용당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체 전체에 꽉 차오르는 이 에너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이 힘을 대한민국 발전의 추동력이 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이 우리의 과제이다.

현 정부는 지난 광복절에 기념사를 통해 에너지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녹색성장을 국가성장력의 새 원천으로 삼겠다고 했다. 방향과 목표의 설정은 좋다고 본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지속적인 추진력이다. 이것이 용두사미가 되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든다.

우리나라를 보다 큰 그림에서 보면, 산업적 의미의 에너지보다 한국민의 총체적 힘으로서의 에너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인다. 시민사회가 정보와 지식에서 정부 못지않게 힘이 강해지고, 전문가들이 정부보다는 시민사회에 더 많이 포진하고 있으며, 열린 공동체에 그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펼치고 삶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이전의 한국 사회와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문명의 전환이기도 하고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이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의 운영방식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합치하는 것이어야 하고, 리더십도 이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 정책도 이런 패러다임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참여민주주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전 정부에서 이에 시동을 걸었다면 이제는 이를 보다 세련된 형태로 만들어 한국 사회의 격을 높여 갈 것이 요구된다. 정부가 주도하고 국민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국가를 운영하는 협치(協治)가 필요하다.

이렇듯이 민주주의도 거친 형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숙한 민주주의가 요구되고, 법치주의도 법과 질서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의 진정한 합의에 바탕을 두는 정당성을 가진 법과 대화적 질서가 기본이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치주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것을 실현시키는 데는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한국민의 에너지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해석하기 쉽지 않다거나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세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러한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보는 한 한국은 거꾸로 뒷걸음만 칠 것이다.

정보, 문화, 의사소통, 지식, 스포츠, 예술, 정치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러한 새로운 모습을 진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먹고사는 물질에만 매달리다 보면 이런 힘을 잡아내지 못한다. 위원회라면 없애고 기구라면 무턱대고 축소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하게 될 ‘한국민에너지위원회’라도 만들어 국가적 수준에서 한국민의 에너지와 상상력을 읽어내 그 물길을 잡아 각 분야마다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동은 정부가 먼저 걸어야 한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