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화쟁사상과 정책적 조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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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좁은 시야의 주장은 항상 위태롭다.영화 『크림슨 타이드』에는「리피자너」라는 말(馬)에 대한 흑백논쟁이 절묘하게 삽입돼 있다.이 영화에서 백인 잠수함장이 명마(名馬)리피자너가 흰말이라고 은근히 인종우월적인 말을 하자 흑인 부함장이 그 말은 망아지때는 검은 색이라고 되받아 인종차별적 편견을 멋지게 논박(論駁)한다.한국사람치고 햇볕이 한낮에는 남향집에 든다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나,이는 한국적 시각에서 옳을 뿐 적도남반부에서는 햇살이 북향집에 쪼인 다.즉 세계적 시각에서는 둘다 틀릴 수도,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우리들의 좁은 소견을 『우다나 경(經)』의 코끼리에 대한 네 소경의 우화를 통해 깨우쳐주고 있다.즉 코끼리의 귀.다리.배.꼬리를 만진 소경들은 각각 알곡을 가려내는 키.기둥.벽.빗자루 같다고 우겼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종교적갈등이 가장 적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논리의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그러한 종교적 융화는 신라 고승이었던 원효(元曉)대사의 가르침에 힘입은 바 크다.자비의 믿음을 실천으로 옮긴걸승(乞僧)이자 깨달음의 선승(禪僧)이면서,그 무엇보다 시공을뛰어넘은 학승(學僧)으로서 그의 화쟁(和諍)의 가르침은 중국에서는 백부논주(百部論主).해동조사(海東祖師)로 일컫게 됐고,일본에서는 종조(宗祖)로 모셔지기 도 했다.여러 종파의 차이점은교리가 아니라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인간의 해석에서 비롯됐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교리적 배타성은 진리(法)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대한 자아집착형태이므로 결국 전체의 진리 또는 완전한 진리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랜 권위주의체제에 길들여졌던 우리들은 이제 민주화체제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 화쟁사상을 실천적으로 익혀야 할 것이다.21세기에 세계 중심국가가 되려면 최근에 쟁점이 되고 있는 신노사정책,신재벌정책,한.약분쟁,과학기술특별법제정 등에 대해 화쟁정신으로 정책적 조화(調和)를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신노사관계 구상은 개혁위원회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종업원의 삶의 질 개선이라는 목표를 똑같은 비중을 두고 추진하기위해 공동선.참여협력.자율책임.교육중시.의식의 세계화 등을 5대원칙으로 삼고 있다.이를 위해 노조측은 복수노 조허용.제3자개입허용.정치참여 등을 주장하고 있고,사용자측은 변형근로시간제.근로자 파견제도.정리해고요건 완화.연월차휴가 축소.생리휴가폐지 등이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아래의 21세기 무한경쟁시대에 불가피함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노사 양측의 갈등이 해소돼 노사관계법 개정의 대타협(大妥協)이 이뤄지려면 과거와 같은 노조의 폭력적 시위나 사용자및 정부측의 일방적 힘의 정치가 아닌 화쟁정신이 바탕을 이뤄야한다.즉 개혁목표와 기준의 합의,각자의 주장이 이들 목표에 어떤 영향을 구체적으로 줄 것인지에 대한 상호이해,기득권이라도 미래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제도개혁이후라도 사전에 합의한 범위밖의 악영향에 대한 사후개정및 조정방식 등의 합의가 구체적 논리로 마련돼야 한다.
신재벌정책에 대한 정부와 대기업의 입장차이는 신노사정책보다 훨씬 쉽게 화쟁으로 해결될 수 있다.재계는 기업그룹을 「재벌」로 보지 말고 「대기업」으로,회장을 「전횡(專橫)의 총수」가 아닌 「그룹의 최고경영자」로 봐줄 것을 요청하면서 선진국에 없는 제도는 재조정하라는 입장이다.그러나 정부는 대기업의 독과점폐해나 불공정관행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쉽사리 개선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대기업정책의 갈등은 정책목표 자체가 아니라 그 방법과 속도에있으므로 솔직한 대화와 상호신뢰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화쟁국사(和諍國師)원효의 가르침은 종교적으로 듀이의 비종파주의를 내건 에큐메니즘보다 1천3백년 앞선 것일 뿐만 아니라21세기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정치적.정책적으로 다시없이 소중한빛이다. 불기(佛紀)2540년과 원효의 1310주기를 단순한 행사로 기리는 것보다는 화쟁정신의 실천으로 우리나라의 시스템을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때 그들의 가르침은 더욱 빛날 것이다.
이진주 생산기술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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