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사막에서 만난 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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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희(1947~) '사막에서 만난 꽃' 전문

눈부신 맨살 드러낸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몇 년째 묵언 중인 스님을 만났다
햇살 부서져 흰 것뿐인 벌판에
기괴하게 몸을 튼 사라쌍수나무
기쁜 웃음 만발한 바위로 앉은
청화스님, 눕지 않고 그대로 십수년이라

서울서 간 나에게 백지 내밀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오늘 아침에
그 꽃을 태우는 다비 소식 실렸다
그야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콜카타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라즈다니 열차 안. 맞은편, 두 명의 인도인 중 한 명이 나와 동갑이었다. 세상의 어디를 가도 동갑끼리는 반갑다. 그가 자신이 수행한 나이 든 인도인을 소개해 줬는데 왕족이라고 했다. 이름 끝에 쿠마리라는 왕족의 혈통이 붙어 있었다. 78세. 노인의 입성은 허름했다. 가부좌를 한 채 잔잔하게 웃던 그는 그 자세로 밤을 샜다. 노인은 눕지 않고 생을 보낸다고 동갑이 말했다. 메마른 그의 몸, 맑고 강렬한 눈빛, 잔잔한 미소…. 열차 안에 푸른빛이 그 밤 내내 머물렀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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