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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차별과 싸운 목발 한평생 … 베풀고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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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고이경희 교수(목발)가 지난해 11월말 춘해대 사은회 때 늦깎이 제자들과 어울려 포즈를 취했다. [춘해대 제공]

“자신의 하반신 마비도 아랑곳 않고 장애인복지를 위해 혼신을 바치신 분이었죠. 그런 분이 전재산마저 후배에게 베풀고 떠나셨으니…. ”

16일 울산시 울주군 은현리에 있는 한 사찰. 부산·울산지역의 사회복지계 인사와 학생·가족들이 지난달 29일 한 여교수의 삼제(三祭) 불공을 올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향년 54세로 타계한 춘해대 사회복지과 이경희 교수.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장향숙 전의원(17대 장애인 비례대표) 은 “ 한평생 장애인에 대한 편견·차별대우와 투쟁하다 쉴 틈도 없이 떠나셨다”며 애통해 했다.

◇목발의 높은 벽=1955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이 교수는 네살 때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 평생을 목발을 짚고 독신으로 세파를 헤쳐왔다. 하지만 동생 명준씨는 “목발 신세보다 더 큰 고통은 장애인 차별의 벽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동래여고 시절 체육과목을 거의 0점을 받고도 1~3등을 놓치지 않는 억척이었지만 대학진학에 좌절, 8년간 방황했다. 약학대학 진학이 목표였는데 70년대엔 전국 어느 약대도 목발 장애인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애인이 장애인복지를 전공하면 되겠지 싶어 28세 늦깎이로 부산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지만 이 분야도 벽은 높았다. 대학원까지 내리 6년간 성적우수 장학생으로, 졸업 때는 부산대총장상까지 받은 실력파였다. 하지만 무려 11년간 교수채용 시험에 응시할 때마다 최종 면접까지 가서 목발을 짚었다는 이유만로 낙방을 거듭했던 것.

◇지독한 큰 언니= 춘해대 서화정 교수는 “이교수는 장애인 복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97년 춘해대에 전임강사로 채용되자마자 학교당국을 설득, 캠퍼스일원 보도를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럭으로 교체하도록 했다. 그가 부임하기 3개월전 공사를 마친 보도를 모두 뜯어내야하는 일이라 재공사를 꺼리는 재단 사무실에서 농성하다시피 떼를 썼야 했던 것.

또 청각장애인이 입학하면 그 수만큼 수화(手話)통역사를 학생으로 뽑아 청각장애 학생의 캠퍼스 생활을 돕도록 제도화했고, 전국 최초로 수화를 사회복지과 전공필수과목으로 채택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수화통역 학생에게는 교수들이 주머니를 털어 전액장학금을 지급하다 나중에 학교 당국이 떠맡았다.

이교수는 장애인 구역 불법주차를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2004년 부산의 한 세미나장 앞에서 장애인용 표시가 된 곳에 불법주차된 일반인 승용차를 발견했다. 즉각 자신의 차로 가로막은 뒤 주인을 기다린 게 3시간, 나타난 주인에게 훈계한 게 3시간. 오후 10시까지 총 6시간 동안 한사람의 주차습관을 뜯어고치는데 할애했다.

장향숙 전의원은 “저상버스 운영과 장애인콜택시 마련을 의무화한 장애인편의증진법(98년)의 입법화에 앞장서는 등 여성장애인 인권운동 현장에도 이교수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회고 했다.

이교수는 5월초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아 부산의 한병원에 입원, 질병휴가를 받고도 “강단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며 쓰러지기 직전까지 한달여 동안 강단을 찾아 장애인복지론 등 2과목 강의에 열정을 쏟았다.

◇유서로 남긴 사랑=이교수는 자신이 살던 부산의 아파트(세금 제외 1억여원)를 매각해 매년 500만원씩 20년간 사회복지학과 학생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써 달라고 춘해대에 유서로 기탁했다. 그는 2003년부터 매학기 30만원씩의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배드민턴을 칠 때 타던 휠체어(시가 200만원)는 간질병에 시달려온 한 제자의 진료비 마련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누구도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늙음을 피할 길도 없다. 장애인·노약자 시설이 님비현상(Not in My back yard-우리집 근처에는 짓지말라)이 아닌 핌피현상(Please in My front yard-제발 우리집 근처에 지어달라)의 대상이 되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이 교수가 후배들에게 숙제처럼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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